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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보수성향 美대법관은 왜 낙태권을 지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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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풀 벗긴 글로벌 이슈-307]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판결이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나왔다. 성소수자(LGBTQ)도 민권법 7조의 보호를 받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해당 법은 고용주가 성별, 인종, 피부색, 국적 등으로 직원에게 차별을 가하는 것을 금지한다. 대법원은 이 중에서 '성차별 금지'에 대한 조항이 남녀뿐 아니라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직장 내에서 차별을 당하거나 해고되어선 안 된다는 점을 사법부가 명확히 한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18일에는 대법원이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제도인 다카(DACA) 폐지 행정명령을 멈춰 세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운동 때부터 공약으로 걸어 추진해온 반대 움직임에 제동을 건 것이다. 29일 나온 루이지애나주 법 폐기 판결도 큰 주목을 받았다. 대법원은 낙태 진료소와 의사 수에 엄격한 제한을 둔 루이지애나주의 낙태 의료시설법이 여성의 낙태권을 침해한다고 봤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총 9명의 법관으로 구성돼 있고,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 중요 어젠다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보수성향 대법관 닐 고서치와 브렛 캐버노를 새로 임명한 바 있다. 보수성향 대법관을 총 5명으로 늘리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도 최근 3건의 주요 판결에서는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성소수자, 이민, 낙태 등 그야말로 진보·보수 진영을 가장 첨예하게 가르는 사안에 대해 대법원은 줄줄이 진보 측의 손을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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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11월 사진 촬영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미국 연방대법원 법관들 사이 존 로버츠 대법원장(맨 첫째줄 가운데)이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출처=블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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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버츠, 그는 누구인가

단번에 이 같은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눈길이 쏠렸다. 언론은 그중에서도 가장 의외의 행보를 펼친 한 사람을 주목했는데, 바로 존 로버츠 대법원장(65)이다. 1955년 뉴욕주에서 출생한 로버츠 대법원장은 하버드대 로스쿨을 우등 성적인 '마그나 쿰 라우데'로 졸업한 수재다. 2005년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사망하자 후임으로 지명됐다. 2012년 오바마케어 합헌에 찬성하는 등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깜짝 판결을 낸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보수성향이었지만 때에 따라 '스윙보터' 역을 맡아온 앤서니 케네디의 뒤를 잇는 인물로 평가된다. AP통신은 "각각 4명의 진보·보수성향 법관들 의견이 갈릴 때 로버츠는 재판부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결정하는 중추 역할을 맡아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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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하는 판결을 내리기 직전 낙태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워싱턴DC 대법원 건물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출처=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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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신념보다 원칙 고수…"선례에 따라 판단했다"

언론들은 대법원의 독립성을 중시하고 판례를 따르는 것이 최우선이라 여겼던 로버츠 대법원장의 기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CNN은 "코로나19 사태, 인종차별 논쟁이 불거진 격변의 시기에 개인의 이념보다 대법원의 조직적 청렴성(institutional integrity)을 우선시한 것"이라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반기를 들거나, 갑작스럽게 진보 성향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AP는 "그가 낙태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이번 결정은 상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로 로버츠 대법원장은 29일 별개 의견을 내고 "나는 2016년 텍사스주 낙태법 당시에도 반대 의견을 냈고 아직도 그 판결이 잘못됐다고 믿는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선례 구속의 원칙(doctrine of stare decisis)에 따라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사건들을 동일하게 처리해야 한다"며 판례 원칙을 고수했음을 밝혔다. 과거 대법원은 4년 전 지금의 루이지애나주 낙태법과 닮은 내용의 텍사스주 낙태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결정을 대법원장이 미국 여성의 신체적 자율성을 보호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신호로 해석하는 것은 실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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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법원이 성 소수자(LGBTQ)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15일(현지시간) 내놓자 찬성 시위대 중 한 명이 워싱턴DC 대법원 건물 앞에서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축하하고 있다. /사진출처=블룸버그


◆가세 기운 공화당 걱정했나…WP "매우 능숙한 정치전략가"

그가 보수정당인 공화당의 존폐를 우려하는 마음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관측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존 로버츠가 다시 한번 공화당을 구하려 한다'는 제목의 칼럼을 내고 "로버츠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만 '이데올로그'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보수에 대한 신념과는 별개로 공론가는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WP는 "공화당을 구해내야 한다는 판단이 서면 진보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매우 능숙한 정치전략가"라고 평가하며 "관련 판결을 뒤집으려는 시도에 이보다 더 최악의 타이밍은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를 키워낸 정당은 보기 드문 위험에 처해 있고 누군가 자제시키지 않는 이상 길게는 수십 년간 정치적 전망이 어두워질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사람"이라며 대법원장의 판단력을 주목했다.

물론 이 모든 행동의 배경에는 정치로부터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장은 2018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막은 판사를 두고 "오바마 판사"라고 비난하자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나 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 클린턴 판사라는 게 없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이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훌륭하고 헌신적인 판사 집단이 있을 뿐이다."

[고보현 기자]

■최근 美 대법원 주요 판결 일지

6월 15일=성소수자(LGBTQ) 고용 차별 금지(6대3)

6월 18일=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제도 폐지 추진 제동(5대4)

6월 29일=루이지애나주 의료법 폐기(5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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