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 북미대화 회의감 넘어 파국 기대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도 폄하
트럼프에 쫓겨난 볼턴, '북 제재' 신봉
북미 제네바 합의 파기 과정 주도
지난해 8월20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앵글 밖에 있는 클라우스 요하니스 루마니아 대통령에게 말하는 것을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쳐다보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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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 등의 비사를 담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책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이 백악관과 청와대를 들쑤셔놨다. 볼턴은 악담을 퍼붓듯 써내려간 회고록을 통해, 안 그래도 상처 난 남북 및 북-미 관계를 마구 헤집었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정책 강경파 중에서도 ‘슈퍼매파’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사실과 의도를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
57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볼턴 회고록은 법적·도덕적 논란과 별개로, ‘메모광’으로 불리는 그가 백악관에서 근무한 17개월 간 꼼꼼하게 축적한 기록에 바탕해 집필한 책이다. 그는 2018년 4월부터 2019년 9월까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곁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미국의 대외전략을 조율한 핵심 인물이다. 특히 그의 재임 기간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들과 함께 한반도에 역동성이 펼쳐지던 때여서, 당시에 관한 퍼즐조각을 맞추는 데 쓰임새가 있다.
하지만 볼턴이 어떤 인물인지, 책에서 빠뜨린 측면은 없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볼턴은 북한과 이라크 등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오랜 소신을 가진 초강경파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그는 영변 핵시설 해체와 경수로 제공을 맞바꾼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깨는 과정에 주요 인물로 등장했었다. 볼턴은 2002년 8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군축·비확산담당 국무차관으로서 서울을 방문해 “북한이 1997년부터 추진해온 고농축우라늄(HEU) 개발이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압박해 2차 북핵 위기의 서막을 열었다. 그의 북한관을 요약하면 ‘역대 미국 정부들이 모두 북한과 협상하려다 실패했고, 오직 강력한 제재만이 해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화나 협상은 ‘북한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하지만 볼턴 주장처럼 일방적 압박만 가하고 대화에는 손 놓으면 한반도 평화는 시작도 할 수 없다.
23일(현지시각) 공식 출간되기에 앞서 해적판 PDF 파일이 유출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 |
볼턴의 이런 시각은 회고록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첫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트럼프에게 먼저 정상회담에 초대하라’고 제안한 게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었다고 정 실장이 나중에 인정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외교적 판당고(스페인의 춤)가 한국의 창조물이었다. 김정은이나 미국에 관한 진지한 전략보다는 한국의 통일 어젠다와 더 연관 있었다”고 적었다. 북-미 대화가 미국 이익과는 무관하게 한국이 만든 판에서 시작됐다는 인식이다. 볼턴은 그해 초 평창겨울올림픽부터 이어져온 남-북-미 사이의 숨가쁜 평화무드 노력과 그 효과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볼턴은 회고록에서 북-미 대화에 관해 회의감을 넘어 아예 성사되지 않기를 원했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1차 북-미 정상회담 장소를 놓고 양쪽이 평양·판문점(북한)과 제네바·싱가포르(미국)로 실랑이를 벌이던 때를 기술하면서 “나의 희망: 어쩌면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적었다. 볼턴은 싱가포르 회담을 앞두고 5월 언론 인터뷰에서 ‘선 비핵화, 후 보상’이라는 ‘리비아 모델’을 북핵 해법으로 제시해 북한의 반발을 샀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볼턴은 준비과정부터 회담 현장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트럼프에게 핵무기 뿐 아니라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까지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해, ‘노 딜’을 관철해냈다.
볼턴은 문재인 대통령의 북-미 중재·촉진자 역할도 ‘트럼프-김정은 사이에서 빛 보려는 속셈’ 정도로 깎아내렸다. 그는 문 대통령이 애초 1차 북-미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열고 남-북-미 3자 정상회담도 하자고 제안했다고 소개하면서, “이것은 대체로 사진찍기 행사에 자신을 끼워넣으려는 문 대통령의 노력이었다”고 적었다. 당시 청와대는 남-북-미 3자 종전선언 등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볼턴은 또 지난해 6월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 당시 북한과 미국 모두 문 대통령의 동행을 원하지 않았는데 문 대통령이 고집했다고 적었다. 평화를 주선하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을 정치적 이득을 노린 행동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22일 <문화방송>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극우파 중에서도 초강경파라고 할 수 있는 볼턴의 일방적 주장이 되게 많이 담긴 것 같다”며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상당히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볼턴의 책에는 불화 끝에 자신을 내쫓은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다. 볼턴은 “트럼프는 국가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구분하지 못한다”며 “대통령직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맹비난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말처럼 “볼턴이 반쪽 진실과 완전히 틀린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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