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평양과 서울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서 더 가까워지고 통일 번영의 미래가 앞당겨지기를 기대합니다." 2018년 2월10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청와대 방명록에 남긴 내용이다.
당시 김 제1부부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특사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김 제1부부장은 남북 관계 개선 의지를 담은 김 위원장 친서(親書)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방북 초청 의사를 구두로 전달했다.
김 제1부부장은 "문 대통령께서 통일의 새 장을 여는 주역이 되셔서 후세에 길이 남을 자취를 세우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제1부부장의 청와대 방문은 '한반도의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시대 전환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김 제1부부장 덕담처럼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을 역사적 현장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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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2018년 4월27일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김 위원장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 세계 각국에 중계됐다.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은 평화를 상징하는 역사적 만남의 공간으로 변모했고, 도보다리의 두 주인공은 단숨에 노벨 평화상 물망에 올랐다.
문 대통령은 같은 해 9월18일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북한 주민 15만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2017년 5월 문 대통령 취임 이전의 남북 관계를 고려한다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김 제1부부장이 청와대 방명록에 남긴 메시지가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한반도의 훈풍은 현실 변화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이제 통일이 머지않았다는, 남북의 군사적 대치가 종식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분단은 현실이다. 과거 남북 관계가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던 이유는 불안정성에 있다.
한두 개의 합의로 모든 게 해결될 것이란 기대는 헛꿈에 가깝다. 실제로 북ㆍ미 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한반도의 훈풍은 금세 한계를 노출했다. '주전파(主戰派)'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수록 한반도는 정전(停戰) 상황이라는 냉정한 현실이 각인됐다.
'혼돈의 한반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사람은 김 제1부부장이다. 그는 북한의 권력 2인자로 올라섰음을 공표하는 데뷔전을 치렀다. 아이러니한 대목은 남북 관계 경색의 촉매제가 그의 역할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 13일 내놓은 담화를 통해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면서 "다음번 대적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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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평화의 메신저로 다가왔던 인물이 2020년 6월 코리아 리스크를 증폭시키는 주체가 돼 버린 셈이다. 결과적으로 김 제1부부장은 '표변(豹變)'한 모습을 보였다. 김 제1부부장이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전한 지 855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북한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며 실질적인 '넘버2'의 위상을 과시했다. 김 제1부부장의 떠들썩한 데뷔전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대북 전단' 문제 때문에 남북 관계를 파탄의 길목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대북 전단 논란은 새롭게 불거진 사안이 아니다. 대남 강경 노선으로의 전환은 또 다른 정치적 포석이 숨겨져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킨 이번 행동은 김 제1부부장에게도 정치적 부담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각고(刻苦)의 노력이 더해져 남북 관계를 한 걸음 전진시키더라도 단 하나의 파열음이 열 걸음 이상의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 게 한반도의 현실이다.
북한이 긴장 고조 행위로 일시적 반사이익을 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에는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에 찬물을 끼얹은 행동으로 기록되지 않겠나.
류정민 정치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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