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영화 <보드랍게>는 그의 다양한 호칭들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위안부 피해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다양한 삶의 궤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들의 발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다.
김 할머니뿐만 아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비판한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 기자회견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위안부 문제에 몰두해 있음에도 우리는 피해자를 모른다. 소녀와 할머니 사이, 복잡하고 다면적인 피해자들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은 30년 위안부 운동을 돌아보고 ‘다시 쓰기’ 위해 선행돼야 할 과제다.
김복동·이용수·김순악·배봉기 할머니. 피해자 4명의 다른 삶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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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같은 삶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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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경남 양산 출신인 김복동 할머니는 ‘정신대를 가야 한다’는 면장과 군인의 협박에 못 이겨 강제 ‘공출’됐다. 1928년 대구 출생으로 가난한 육남매 집의 고명딸로 컸던 이용수 할머니는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친구 어머니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국민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를 따라나섰다. 둘은 1992년 피해 신고를 한 뒤 국내외를 누비며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김복동·이용수 할머니는 대표적인 위안부 활동가로 꼽혔지만, 그 행보는 같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김 할머니가 정의연과 함께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 전시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활동으로 넓히는 데 힘을 모았다면, 이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자체에 집중한 편이다. 이 할머니는 한 단체와 꾸준히 함께하기보다 정의연, 나눔의집, 대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등 다양한 단체와 활동했다. 이 할머니가 머무는 대구·경북 지역은 특히나 시민모임이 활발한 곳이라 그는 지역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래픽 | 윤여경 기자 tigeryoonz@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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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만 있는 존재에서
할머니들 공개증언으로
실재하는 피해자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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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순악 할머니는 ‘공장 취직’ 즉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1943년, 만 15세에 위안소로 떠났다. 해방 이후 평양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지만,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이미 버린 몸’이라고 생각해 유곽 생활을 했다. 이후 기지촌 종업원, 외제 판매, 식모살이 등을 했다. 아들 두 명을 뒀지만, 남편은 없었고 가족에 대한 언급도 꺼렸다. 피해자 상당수가 1990년대 초 피해 신고를 한 것과 달리 2000년에야 피해 신고를 했다. 그는 1997년 ‘훈 할머니’로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 이남이씨가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위안부’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2010년 5400여만원을 사회에 기부하며 세상을 떠났다.
다수의 피해자가 10대에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과 달리, 배봉기 할머니는 만 29세이던 1943년에 위안부에 ‘공출’됐다. 그는 ‘남쪽 섬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오키나와에 있는 위안소로 향했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했던 그는 1975년 일본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 일본 언론을 통해 위안부임을 한국인 최초로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잊혀졌다. 배 할머니는 1991년 국내에 위안부 피해 등록을 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했다
그래픽 | 윤여경 기자 tigeryoonz@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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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시위로 ‘치유’됐지만
일본 기금 수령 문제 등
‘방향’이 다르면 소외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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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과 한국의 연구자들이 모두 참여하고 피해자들이 원고로 증언한 ‘2000년 법정’(일본군 성노예제와 관련된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열린 모의 법정)은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수난’에서 보편적 여성인권의 문제로 확장한 계기가 됐다. 피해자들에게는 치유의 경험을 주었다. “우울증과 화병으로 술과 담배, 다툼으로 점철된” 김순악 할머니의 삶은 2000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지원 대상이 되면서 달라졌다. 그는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보고 또 보았다.
그에게 그것은 “나라에서 나를 ‘위안부’ 피해자라고 인정해준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준 것”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피해자의 요구와 운동의 방향이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일본 민간에서 조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은 피해자와 피해자, 일본과 한국의 활동단체가 분열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이 기금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며 수령을 반대했다.
기금은 ‘영혼을 더럽히는 돈’이고 이를 받으면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여론이 퍼졌다.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도 정대협 입장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심미자 할머니를 비롯해 기금 수령에 우호적이었던 피해자들도 적지 않았다.
기금 수령을 둘러싼 여론 형성 과정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피해자 합의 때에도 비슷하게 재현됐다. 정대협은 “할머니들에게 기금 수령을 막지 않았다”고 했지만, 생존 피해자 47명 중 절대 다수인 34명이 왜 기금을 수령했는지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피해자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거나 일본 정부와 가족에게 이용당했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정유진 전 도시샤대학 조교수는 “운동단체가 기금을 수령하는 이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 사회가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피해자를 열망하기 때문”이라며 “피해자들이 국가배상금이 아닌 돈을 받으면 민족의 성원에서 배제될 것이라 우려하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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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할머니’에만 초점
가난·차별로 고통받은
중간의 삶 조명받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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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할머니 등에 대해서는 ‘가짜 피해자’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2005년 일본군 군인군속자료에서 이름이 발견돼 강제동원 사실이 기록으로 입증된 피해자다. 그에 비해 이 할머니의 진술은 자주 바뀌어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가 피해 이후 약 40~50년이 지난 이후에야 증언에 나설 수 있었던 사회적 여건 등을 생각하면, 이들의 증언이 다소 부정확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상당수가 해방 후 50년 가까이 자신의 피해를 정의할 언어조차 갖지 못했고 1990년 이후에야 ‘위안부’를 알게 된 뒤, 인권운동가로 거듭났다는 점에서 이들의 생각이 꾸준히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연구위원은 진술 변화는 이용수 할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위안부 운동은 독립운동’이라는 설명이 유행하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 팔려 갔다’고 진술하는 식이다. 그는 “정대협이 (시기에 따라 피해자에게) 원하는 진술을 강요했다기보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정대협이 이 과정에서 특정 피해자를 앞세운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정대협 입장에서 일본의 공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피해 사실이 확실한 할머니’를 앞세우는 것”이라며 “운동의 효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20세기 마지막 ‘수요집회’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1999년 12월 29일 일본대사관이 있는 서울 교보빌딩 앞에서 20세기 마지막‘수요집회’를 가졌다. 자신의 시위참가 사진을 들고 참석한 한 할머니의 얼굴에서 세기가 바뀌어도 과거사를 해결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읽을 수 있다. 김문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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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
그들의 ‘공통된 뜻’이 있다는 건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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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2)가 정의기억연대 등 위안부 단체의 운동 방향을 비판하기 전까지 ‘피해자 중심주의’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처럼 쓰였다. 문재인 정부 역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며 ‘피해자 중심적 접근의 부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이 할머니의 문제제기로 피해자 중심주의는 다름 아닌 ‘피해자’에 의해 도전받게 된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일본이 위안부 피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인하고 문헌 자료를 은폐해왔기 때문에 생존 피해자들의 증언이 범죄를 입증할 중요한 근거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 의미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논란을 거치면서 피해자들이 원하고 동의하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 활동가 등 10여명에게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물었다. 정치권, 학계, 시민운동계에서 이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아직 없다. 다만 “피해자의 뜻을 존중하는 운동 방식과 합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합의가 있을 뿐이었다.
‘피해자의 공통된 뜻’이 있다는 것은 이 운동이 가진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생존한 정부 등록 위안부 피해자는 17명이다. 이들이 모두 정의연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 할머니의 문제제기에 동의한다고 볼 수도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유족들이 위안부 피해를 2차 증언하고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실상 동아시아 전역에 퍼졌던 위안부 피해자,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의 요구를 하나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미래로 보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목소리(홀로그램 ver.)
쉬운 해결책으로 한국 사회는 그간 알려진 몇몇 피해자와 이들과 함께하는 운동단체의 행보를 ‘피해자의 뜻’으로 해석해왔다. 최근 사태가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연의 대립 구도로 단순화된 것은 이러한 위안부 문제의 소비 방식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활동 방식을 비판했던 피해자가 이 할머니 외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크게 불거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사회가 경청해주는 피해자가 소수였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전 한국정신대연구소장)은 “피해자의 다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맥락은 거세된 채 ‘발언’에만 치중해선 피해자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세울 수 없다”며 “피해자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살펴서 논의해 나가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말했다.
피해자가 살아 있는 현재와 세상을 떠난 이후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접근이 달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실재하지만, 미래에는 이들의 뜻이 활자와 영상 등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를 오직 당사자에만 국한할지, 이들과 함께한 유족, 활동가, 더 넓게는 비슷한 성폭력의 역사를 살아온 시민들의 트라우마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확장할지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헌미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연구소 HK+연구교수는 2019년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넘어서: 피해자 중심 해결의 원칙과 한국 사회의 현주소’에서 “(세상을 떠나는 피해자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를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지 않고 대변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부는 피해자 중심성이라는 개념을 협소한 당사자주의에서 벗어나 사회문화적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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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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