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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김혜진, 노동 더불어 숲]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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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혜진 ㅣ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저같이 억울하게 당하다가 죽은 사람이 없도록, 경비가 억울한 일을 안 당하도록 도와주세요.” 아파트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비노동자 최희석씨의 음성 유언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약 보름의 기간 동안 심각한 폭행과 폭언이 반복되었고 협박이 지속되었지만, 이 사회 누구도 최희석씨를 온전히 지켜주지 않았다. 가해자 한 명을 처벌한다고 해서 경비노동자에 대한 무시가 사라지지 않으며, ‘착한 입주자’ 운동을 한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렇게 경비노동자에 대한 갑질과 해고 협박이 반복되는 것은 이것을 용납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인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런 현실을 바꿔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는 보통 경비, 순찰, 주차 관리, 수목 관리, 재활용품 관리 등의 업무를 한다. 이 업무 안에 ‘친절서비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경비노동자는 아파트를 공동으로 관리할 필요 때문에 고용된 것이며, 최선을 다해 그 업무를 잘 수행하면 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경비노동자에게 친절을 요구한다. 때로는 업무 외의 노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것은 경비노동을 ‘하인노동’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일을 위해 고용된 것이며, 자신의 인격을 판매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경비노동자는 부당한 요구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고용주로서 관리업체는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하고 경비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권한과 책임이 현실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경비노동자는 고용이 불안하여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관리업체는 재계약이 불안하여 아파트 입주민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최희석씨는 주차 관리를 위해 이중주차된 차량을 밀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 업무방해와 일터 괴롭힘이 동시에 벌어졌지만 어디에도 항의하지 못했다. 항의를 하거나 법적 대응을 할 경우 본인이 해고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한 아파트 관리업체가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관리업체들은 대부분 노동자를 나무라거나 해고해버린다. 입주민들에게 밉보이면 재계약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비노동자를 폭력이나 협박에서 보호하는 것은 결국 입주민들일 수밖에 없다.

최희석씨가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할 때 아파트 입주민들이 함께 나서주었다고 한다. 고인도 유서에서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마음들이 정말 소중하다. 그런데 이 아파트 입주민들은 최희석씨를 지지했지만 폭력 행위자를 강하게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자신들을 제3자라고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입주자대표회의는 모든 권한을 갖고 있지만 책임은 관리업체에 넘기고 있다. 권한을 가진 실질적인 사용자이면서도 사용자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사용자’로서 관리업체와 공동책임을 지도록 법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경비노동자를 보호할 의무가 생기고, 경비노동자가 부당한 폭력의 피해를 당할 때 책임을 나눠 맡게 된다. 그래야 나쁜 입주민을 강하게 제지할 근거도 생긴다.

존중받는 노동은, 착한 사람들 덕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 아파트 입주민들이 경비노동자에게 인사도 잘하고 친절하게 대하더라도, 몇 명의 입주자들이 경비노동자의 권리를 훼손하여 억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존중은 선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경비노동자와 입주민이 진정으로 서로를 존중하려면, 경비노동자가 맡은 업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경비노동자가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거나 부당한 행위에 맞설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실질적 권한을 가진 입주자대표회의가 사용자로서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 제도적 존중의 기반 위에서 신뢰가 축적될 때, 비로소 친절함이 미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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