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위로 칼질을 하는 소리, 싱크대 물을 틀어 채소를 씻는 소리, 압력솥의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
식당이나 가정에서 밥을 지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들. 이 소리는 이달 1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유가족들의 단체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이하 유족회)의 기자회견장에서 유가족들의 목소리와 겹쳐 들려 왔다. 실제 인천 강화군의 한 식당에서 열린 회견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 전신)에 대해 성토하고,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전 정의연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자리였다.
회견에는 양순임(76) 유족회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가족 2명이 참석했다. 정의연과 관련한 추가 폭로 가능성이 있는 회견인 만큼 현장은 발 디딜 틈 없이 기자들로 가득 찼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회견이 이뤄진 테이블에서 가까운 조리실에 자리 잡은 탓도 있겠지만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회견 대부분은 그간 정대협과 윤 의원에 대한 비판에 할애됐다. 동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모 할머니의 자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짧게 지나갔다. 제한된 시간 탓에 정제된 내용을 양 회장이 대표로 전달해야 했겠지만, 구체적인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아쉬움이 남았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이번 회견뿐만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92) 할머니 역시 정의연과 윤 의원을 비판하는 두 차례의 기자회견을 했다. 지난 7일 첫 번째 회견에서 이 할머니는 “성금, 기금 등이 모이면 할머니들에게 써야 하는데 (정의연이)할머니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25일 두 번째 회견에서는 “정대협에서 ‘위안부’를 이용한 것은 도저히 용서를 못 한다. 벌을 받아야 한다”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린 두 차례 회견이었지만 이 역시 ‘다른 소리’들에 가려지고 있다. 이 할머니 관련 기사에 달리는 ‘치매’ ‘노망’ ‘대구’ 등 노인 혐오와 지역 비하가 담긴 댓글들이 그것이다. 피해자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를 지키려 피해자를 공격하는 전도(轉倒)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혐오와 비하로 피해자의 입을 막는 2차 가해는 ‘단체’를 위해 ‘피해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고와 맞닿아 있다.
김 할머니의 딸 김모 씨는 회견 마지막에 어머니를 떠올리며 “같이 살면서도 엄마가 우리한테 (피해자란 사실을) 감추고 다녔다”며 “일본을 갈 때에도 놀러갔다 올게, 밥 해 먹고 있어라(고 말했다). ‘네가 그 사람 딸이구나’ 할까 봐 지금도 두렵다”고 울먹였다. 김 할머니도 일본군에 의한 피해를 겪지 않았다면 가족에게 “밥 해 먹고 있어라”가 아닌, 기자가 회견장에서 거슬려했던 ‘밥 짓는 소리’를 자녀에게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가리는 2차 가해는 더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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