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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잇단 ‘2차 가해’ 속…사라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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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견, 피해자 목소리 들을수 없어 아쉬움

목소리 낸 이용수 할머니에 ‘치매’ ‘대구’…‘단체’ 지키려는 2차 가해

“피해자 울분·목소리에 집중해야…목소리 가리는 2차 가해 멈춰야”

헤럴드경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1일 오후 경기 광주시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법인 나눔의집을 방문해 활동가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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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인천)=박상현 기자] 도마 위로 칼질을 하는 소리, 싱크대 물을 틀어 채소를 씻는 소리, 압력솥의 증기가 빠져나가는 소리, 곳곳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식당이나 가정에서 밥을 지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들. 이들 소리는 이달 1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일제 강제 노역 피해자 유가족들의 단체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이하 유족회)의 기자회견장에서 유가족들의 목소리와 겹쳐 들려 왔다. 실제 인천 강화군의 한 식당에서 열린 회견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전신)에 대해 성토하고,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전 정의연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자리였다.

회견에는 양순임(76) 유족회장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가족 2명이 참석했다. 이른바 ‘정의연 사태’를 촉발시킨 이용수(92) 할머니의 두 차례 회견 후, 또 다른 피해자들의 추가 폭로 가능성이 있는 회견인 만큼 현장은 발 디딜 틈 없이 기자들로 가득 찼다. 마땅한 자리가 없어 회견이 이뤄진 테이블에서 가까운 조리실에 자리 잡은 탓도 있겠지만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회견 대부분은 그간 정대협과 윤 의원에 대한 비판에 할애됐다. 현장에 동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모 할머니의 자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짧게 지나갔다. 제한된 시간 탓에 정제된 내용을 양 회장이 대표로 전달해야 했겠지만, 구체적인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아쉬움이 남았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비단 이번 회견뿐만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이 할머니 역시 정의연과 윤 의원을 비판하는 두 차례의 회견을 가졌다. 지난달 7일 첫 번째 회견에서 이 할머니는 “성금, 기금 등이 모이면 할머니들에게 써야 하는데 (정의연이)할머니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5일 두 번째 회견에서는 “할머니 있을 때 잘해야 하는데, 고생시키고 끌고 다니면서 할머니들 이용해 먹고 뻔뻔스럽게 묘지에 가서 눈물을 흘린다”, “정대협에서 위안부를 이용한 것은 도저히 용서를 못 한다. 벌을 받아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하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린 두 차례의 회견이었지만, 이 역시 ‘다른 소리’들에 가려지고 있다. 이 할머니 관련 기사에 달리는 ‘치매’, ‘노망’, ‘대구’ 등 노인 혐오와 지역 비하가 담긴 댓글들이 그것이다. 이 할머니에 대한 2차 가해가 이어지자, 남인순 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달 1일 “온·오프라인에서 확산되는 2차 가해가 할머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흐리고 소모적인 편 가르기만 낳고 있다”며 “이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피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달 1일 회견에서 양 회장은 “정대협과 윤미향은 수십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피해자 중심의 단체가 아닌 권력 단체로 살찌웠다”며 “할머니들이 생전에 정대협과 윤미향을 상당히 무서워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를 피해자가 두려워해선 안 된다. 혐오와 비하로 피해자의 입을 막는 2차 가해는 ‘단체’를 위해 ‘피해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전도(轉倒)에 지나지 않는다.

회견에 함께한 김 할머니의 딸 김모 씨는 회견 마지막에 어머니를 떠올리며 “엄마와 같이 살면서도 엄마가 우리들한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란 사실을)감추고 다녔다”며 “일본을 갈 때도 놀러 갔다 올게, 밥 해 먹고 있어라(고 말했다). ‘네가 그 사람 딸이구나’ 할 까봐 지금도 두렵다”고 울먹였다. 김 할머니도 일본군에 의한 피해를 겪지 않았다면, 가족들에게 “밥 해 먹고 있어라”가 아닌 기자가 회견장에서 거슬려 했던 ‘밥 짓는 소리’를 자녀들에게 들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의 울분, 피해자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가리는 2차 가해를 멈춰야 한다.

poo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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