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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한반도 평화, 베를린서 묻다]북한인권 문제, 극우반공에게 맡겨둘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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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3>비난 아닌 충고로서 인권 문제 제기
한국일보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이던 2019년 11월 6일. ‘작은 베를린’이라 불렸던 독일 중동부의 작은 마을 뫼들라로이트에 분단의 상징인 철조망과 감시탑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뫼들라로이트=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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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서 어른이 되면 아름다운 세상을 보러 다닐 거예요. 쇠로 만든 새 등에 올라 저 멀리 우주를 가로질러 다닐래요. 강과 바다와 대양의 물위를 날아다닐래요. 구름이 누나가 되고 바람이 형이 되겠죠.”

1944년 열네살의 아브라함 코플로비츠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검은 연기로 사라지기 전에 남긴 시 ‘꿈’의 첫 연이다. 비극의 역사 현장에서 아이와 청소년을 만나는 건 항상 감당하기 어렵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중 16세 이하의 희생자는 4분의 1에 달했다.

베를린 장벽도 그랬다. 베를린 장벽 희생자 136명 중에도 20세 이하가 4분의 1을 넘겼다. 16세 이하의 희생자가 9명, 16세에서 20세 사이의 희생자는 34명이었다. 희생자 중 15개월된 막내 홀거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동서독 분단의 비극, 15개월 아기의 죽음

동독의 청춘 남녀 잉그리트와 클라우스는 1970년 초 소련 수학여행 길에 눈이 맞았다. 둘은 돌아와 금방 결혼했다. 결혼 직후부터 그들은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24살의 남편 클라우스는 이미 17살 때 동독 탈출을 시도한 전력 때문에 낙인이 찍혀 좋은 직장을 갖기가 어려웠다. 21살의 아내 잉그리트는 교사였지만 공산주의 정치교육에 신물이 났다. 1973년 1월 이제 갓 15개월을 넘긴 아들 홀거에게도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안겨주고 싶었다.

그들의 탈출 의사를 확인한 서베를린의 지인들은 1월 22일 밤 동독 도시 포츠담에서 서베를린 사이의 통과 경유지 주차장에다 화물차를 대기시켰다. 클라우스와 잉그리트는 포츠담에서 주차장으로 진입해 화물차 짐칸에 재빨리 옮겨 탔다. 그들은 각각 두 개의 상자 속에 따로 들어갔다. 엄마 잉그리트가 아기 홀거를 품었고 아빠 클라우스는 옆 상자에서 따로 숨을 죽였다. 화물차가 서둘러 출발했지만, 검문지 초소에서 동독 국경경비대의 탐색이 길었다. 그들은 ‘통과’ 소리를 초초하게 기다렸다.

갑자기 홀거가 울기 시작했다. 잉그리트는 급히 아이의 입을 막아 소리를 죽였고, 탈출은 성공했다. 검문소를 벗어나 서베를린 방향으로 300미터쯤 왔을 때 부부는 화물상자를 치우고 나왔다. 기쁨을 만끽하려던 순간, 잉그리트가 “우리 아기, 우리 아기!”를 부르며 절규했다. 부부는 홀거가 이미 중이염과 기관지염을 앓아 코로 숨쉬기가 곤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홀거의 작은 몸은 굳어갔고 어린 생명을 되돌리려는 어른들의 안간힘은 수포였다. 부부는 동독을 탈출해 자유를 얻었지만 아기는 ‘바람’과 ‘구름’ 사이로 ‘새’가 되어 떠났다. 동서독 분단이 낳은 숱한 비극적 생애사와 가족사의 한 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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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동독인 부모와 함께 국경을 넘던 15개월 된 아기 홀거의 모습. 부모는 아이에게 더 자유로운 세상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지만, 탈출 과정에서 아이는 안타깝게 숨졌다. 베를린장벽기념관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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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인권유린에 서독은 ‘평화정치’ 강조

15개월짜리 아기의 막힌 숨결과 꺼져간 눈동자를 잠시 뒤로 두고 사건의 날짜를 다시 보자. 그 죽음은 1972년 12월 21일 동독과 서독이 기본조약을 체결한지 한 달 만에 발생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동서독이 평화정치를 약속하며 온갖 협상과 협력을 막 개시한 뒤 첫 번째 발생한 베를린장벽의 희생이었다.

그 후에도 베를린과 동서독 국경에서는 유사한 비극이 이어졌다. 1972년 12월 동서독간 기본조약 체결 후에 1989년 말까지 베를린장벽에서는 총 31명이 동독군인들의 총격이나 검문 과정에서 사망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동서독 국경지역에서 동독을 탈출하다 사망한 동독 주민의 수도 46명에 달했다. 비록 그 수가 1972년 전에 비해 줄어들기는 했지만,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서독 반공단체와 극우파들은 동독 정권을 규탄했고 “인권 없이 평화 없다”는 구호로 결집했다.

서독 정부는 그것에 맞서 “평화 없이 인권 없다”며 평화정치가 인권문제 해결의 전제조건임을 강조했다. 물론, 서독 정부와 시민사회도 동독 인권문제에 눈을 감지는 않았다. 그들이 문제 삼은 공산주의 동독의 인권유린은 자유로운 이동과 여행 제한과 국경봉쇄 및 차단, 외부 세계와의 접촉과 소통 제한, 정치 억압과 사법 탄압이었다. 특히 동독 탈출을 시도한 주민들은 동독 형법 213조에 의해 5년 내지 8년 까지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정치범으로 규정되었다. 1989년 말까지 동독에서 정치범으로 탄압받은 사람의 수는 대략 17만 5,000명에서 23만 1,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한편, 동독도 사회주의 인권 개념을 창안해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 개념이 계급 지배의 은폐에 불과하며 “사회주의 없이는 인권 없다”고 맞섰다. 1970년대 동독이 내세운 ‘사회주의 법치국가’는 개인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권리가 아니라 인민과 국가의 집단적 자기결정만을 옹호했다. 아울러 동독은 빈민 문제와 정치범 탄압 등을 내세워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곳은 동독이 아니라 오히려 서독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서독 사회도 결함이 없지 않았지만, 체제 비판의 자유와 갱신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근본적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동독의 인권 개념은 곧 동독 주민들 다수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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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수용소에 갇혀 생활하는 동독의 정치범들의 모습. 독일연방정치교육원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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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적 충고, 대결 조장용 아니다

1970년대부터 진보든 보수든 서독 정부지도자들은 먼저 ‘규범적’인 차원에서 동독의 인권유린을 비판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이미 기본조약을 맺을 때 제2조에서 동서독 모두 유엔헌장의 준수, 즉 인권보호를 약속한다는 규정을 관철시켰다. 서독의 총리와 각료들은 좌파든 우파든 모두 ‘민족의 상황 보고’라는 의회 정례 연설에서 베를린 장벽과 국경 봉쇄 장치, 발포 명령, 자유로운 이동 제한 등을 열거하며 동독의 비인도성을 비판했고 동독 집권자들에게 개선을 요구했다. 서독 정부는 1961년 설립된 ‘잘쯔기터 중앙기록보존소’를 유지하며 동독의 인권유린 현황을 꾸준히 기록하며 감시했다.

오해를 피하자. 서독 정부의 동독 인권 비판은 규범의 선언이었고 견제의 원칙이었다. 대결이나 불화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비판은 항상 시와 때가 있었다. 언어는 적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친구에 대한 충고의 어조였다. 서독 정부의 규범적 인권정책은 동독 체제의 전복이나 고립을 겨냥하는 ‘대결적’ 인권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국내의 일부 오해와는 달리, ‘잘쯔기터 중앙기록보존소’도 사실 동독 정부를 규탄하기 위한 정치 선전도구가 아니라 인권유린의 실제 가해자들에 대한 사전 조사용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서독 정부는 ‘동독인권보고서’ 같은 것을 발간할 수 없었고 발간하지 않았다.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는 “곤경에 처한 사람의 운명을 정치 선전의 수단으로 삼는” 전투적 반공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5년부터 1990년 독일통일까지 서독 외무부장관이었던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1985년 연방의회 연설에서 “인권문제 해결에 필수불가결한 동독 정부의 협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체제 안정의 파괴를 노린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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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정부의 지원을 받은 교회복지협회 디아코니회가 동독 정치범들을 버스에 태워 서독으로 들어오고 있다. 독일연방정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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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프라이카우프’로 실용적 인권정책 달성

‘조용한 외교’가 더 중요했다. ‘실용적’ 인권정책이 ‘규범적’ 인권정책을 도왔다. 인권문제의 최종 해결이 동독 체제의 민주화를 통해서 이루질 것이라 본다면, 인도적 문제의 경감이라는 중간 단계가 징검다리로 필수 불가결했다. 인권유린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더 많이 구출하고 현실적으로 돕는 것이 관건이었다.

먼저, 서독 정부는 동독 정치범들을 구매해서 서독으로 이주하도록 조치(프라이카우프ㆍFreikaufㆍ자유를 위한 거래)했다. 1963년부터 1989년 동독 체제 붕괴 시까지 서독 정부와 민간 협력기관들은 동독의 정치범 3만 3,755명을 교도소에서 석방하도록 했다. 석방에 대한 대가로 서독은 동독에게 모두 34억 마르크 상당의 현물을 지불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인당 4만마르크(약 3,000만 원)를, 그 뒤엔 9만5,847마르크(약 8,000만 원)를 냈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합법적으로 이주한 주민의 수도 1970년대,80년대 내내 한 해에 7,000명에서 3만5,000명 사이를 오르내렸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후 동서독 주민의 상호방문도 계속 늘었다. 이를테면, 1984년 한 해 동안만 약 240만명의 서독인들이 동독을 방문했고, 동독 주민들은 약 150만명의 연금생활자 노인들 이외에도 “긴급한 가사상의 이유”로 약 6만1,000명의 사람들이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 실용적 인권정책의 찬연한 성과다. 물론, ‘홀거’ 가족의 비극을 잊을 수는 없다. 서독의 인권정책이 항상 그리고 온전히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도 그것은 의미 있는 성취였다.

한반도에서 그리스의 두 자매 여신, 디케와 아이레네는 길을 잃었다. 인권의 정의, 평화의 질서 모두 혼란에 빠졌다. 북한 인권문제를 극우 반공주의자들이 평화정치를 방해하고 교란하는 빌미로 사용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인권과 평화를 길항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과 과정을 발견하고 발명해야 한다.

정치적 외눈박이들의 고성에 맞서려면 먼저 두 눈을 부릅떠야겠지만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자세도 필요하다. 임마누엘 칸트는 ‘영구평화’에서 “뱀처럼 지혜로운” 정치와 “비둘기처럼 순결한” 도덕의 결합을 초들며 ‘정치적 도덕가’가 아니라 ‘도덕적 정치가’를 구했다. 그것 또한 평화정치의 길이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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