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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이슈 유가와 세계경제

`마이너스 유가` 에 중남미 자원부국 비명…`석유 풋옵션 보유` 멕시코, 긴급 금리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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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19판데믹(전세계 대유행) 속에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유가'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중남미 산유국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유가가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증시처럼 '서킷 브레이커'(거래 일시 중단)를 겪는 상황이 됐다. 중남미 산유국들은 글로벌 유가에 따라 국운이 오간 과거를 이미 경험했지만 이번에는 판데믹까지 겹친 상태여서 위기감이 극에 달하는 모양새다. 멕시코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지난 달과 달리 이달 중남미 산 원유는 거래가 뚝 끊겼다. 21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걸프만 일대 원유 거래 중개업자들이 '유가 폭락'을 이유로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산 원유 5월 현물과 6월 선물 거래를 일시 중단했다가 몇 주 전 거래를 재개했다고 전했다. 북미 멕시코 산 마야 원유 값도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져 거래 중단 사태를 겪었다. 멕시코와 중남미 산 원유는 하루 평균 500만 배럴 정도가 생산되고 주로 걸프만 일대에서 거래된다. 절반은 장기계약, 나머지 절반은 실물 시장에서 현물로 팔린다.

걸프만 시장에서 마이너스(-) 유가 사태가 벌어지자 최근 중개업계는 원유 지불 가격이 배럴당 10센트 미만으로 떨어질 수 없도록 가격 하한선 조항을 설정했다. 지불 가격이 마이너스가 되면 판매자가 비용을 부담해가면서 구매자에게 원유를 배달해야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막겠다는 것이다.

지난 달보다 이번 달이 더 심각한 이유는 코로나판데믹 시차 때문이다. 이달 미주 대륙에서 트럭 화물 운송이 부쩍 줄어든 것이 거래 중단 사태를 야기했다. 중남미 산유국이 생산하는 원유는 대부분이 중질유다. 중질유는 주로 트럭 연료인 디젤로 정제·가공되는데 미주 대륙에서는 화물 트럭 운송이 많다. 코로나19피해를 일찍 겪은 아시아 대륙과 달리 미주 대륙에서는 이번 달 들어 코로나19피해가 급증했고 이에 따라 이달 화물 운송 수요가 급감했다.

이런 가운데 멕시코 중앙은행(Banxico)은 21일, 예정에 없던 긴급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기존 6.5%이던 기준금리를 6.0%로 대폭 낮췄다. 또 총 7500억 멕시코 페소(약 38조원)규모의 금융시장 지원책도 발표했다. 하루 전인 20일,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산텍사스유(WTI) 5월물 가격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 치는 등 글로벌 유가 폭락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 데 따른 반응이다.

멕시코가 이처럼 긴급 대응에 나선 것은 세간에 알려진 '석유 풋 옵션' 보유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풋 옵션이란 미리 정해놓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석유 풋 옵션은 유가 하락에 대비한 보험같은 성격이기 때문에 멕시코 뿐 아니라 다른 산유국도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국가 차원 거래가 알려진 건 멕시코 정도다. 앞서 이달 9일 멕시코는 OPEC+(OPEC과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대체) 긴급 감산회의에서 자국에 할당된 감산량(5~6월 간 하루 평균 40만 배럴 감산)을 끝까지 반대했었다. 이후 12일 벼랑 끝 전술을 통해 '10만 배럴 감산' 주장을 관철했는데, 이와 관련해 멕시코가 20여년 간 '석유 풋 옵션'을 보유해온 사실이 당시 블룸버그 통신 보도를 통해 알려져 시장 관심을 끈 바 있다. 글로벌 데이터정보업체 CEIC에 따르면 멕시코 원유 생산량은 2018년 기준 하루 평균 181만 배럴이다.

멕시코 입장에서는 유가 폭락이 석유 풋 옵션 보유에 따른 이익을 넘어서는 뼈아픈 현실이다. 원유 생산국임과 동시에 석유 등 에너지 수입국이라는 복잡한 사정 탓이다. 원유를 수출하려니 유가가 너무 많이 떨어져 수지 타산이 맞지 않고, 내수로 쓰기에는 아직 정제·가공 비용이 높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암로) 대통령은 지난 2018년 12월 '89년만의 정권 교체'를 이루면서 '에너지 강국'을 내건 경제 정책을 펴왔다. 국영석유사인 페멕스(Pemex)의 노후 시설을 정비하고, 정유 공장을 추가로 지어 원유를 증산하겠다는 것이 대통령 생각이었다. 이를 통해 생산·가공 비용을 낮추면 미국산 가공 연료 수입도 줄이는 효과가 따른다.

이 때문에 OPEC+긴급 회의를 앞둔 지난 5일 암로 대통령은 코로나19대책을 발표하면서 "국제 시장에서 원유 가격이 떨어지고 있지만 멕시코에서는 하루에 40만 배럴씩 생산을 늘리게 할 것"이라면서 "타바스코 지역에서 도스보카스 정유소 건설이 착착 진행 중"이라고 증산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었다. 당시 대통령은 코로나19대응책을 말하면서 페멕스에 대한 법인세 대폭 감면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해 말 페멕스 부채는 1050억 달러에 이르는 데 부채 부담이 더 커지기 전에 감세를 통해 페멕스를 살리겠다는 의지에서다.

하지만 코로나19판데믹 그림자가 나날이 짙어지면서 당장은 페멕스 설비 투자보다 코로나19 대응에 재정을 쏟아 부어야하는 상태가 됐다. 판데믹 여파로 멕시코 정부는 올해 경제가 3.9%위축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6.6%)이나 민간 투자은행(-8~-10%)은 더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페멕스와 멕시코 국가 신용등급은 줄줄이 강등됐다.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무디스·S&P·피치) 중 하나인 무디스는 지난 17일 멕시코 국가 신용 등급을 기존 A3에서 Baa1로 1단계 낮췄고, 페멕스 신용등급은 기존 Baa3에서 Ba2로 두 단계 강등했다. 무디스는 "멕시코 경제는 최선으로 봐도 2021~2023년 평균 2%성장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냈다. 앞서 3월 말 S&P가 국가 신용등급을 기존 BBB+에서 BBB로 낮춘 데 이어 지난 주에는 피치도 기존 BBB에서 BBB-로 하향한 바 있다.

남미 아르헨티나는 나라 역사상 9번째 국가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내몰렸다. 20일 아르헨티나의 주요 3개 채권단이 성명서를 내고 '지난주 아르헨티나 정부가 제안한 외채 구조조정 조건을 거부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부채 위기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코로나판데믹 탓에 유가가 떨어진 것은 부정적인 소식이다. CEIC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하루 평균 49만 배럴(2018년 기준) 원유를 생산한다. 20년 전(1998년·85만 배럴)보다 생산이 줄었다. 다만 유가 하락에 따라 셰일가스 투자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셰일가스 세계 2위 매장국'인 아르헨티나는 셰일 산업에 외국 자본을 적극 유치하려했지만 현재로서는 판데믹 탓에 기존에 있던 글로벌 셰일 업체마저 파산 위기에 놓인 상태라 투자 유치가 여의치 않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지난 해 12월 취임하면서 IMF를 포함해 해외채권단에 진 나라빚 총 3110억 달러 중 57%에 하당하는 1950억 달러 규모 외채를 재협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근 정부 제시안은 2023년까지 이자 지불을 3년 간 유예해달라는 것이다. 다만 주요 채권단 중 하나인 UBS가 "예전같이 채권단에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내며 난색을 표하고 있어 정부가 원하는 대로 이달 안 합의를 보는 것은 어려워보인다고 현지매체 인포바에 등이 20일 전했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지'인 베네수엘라도 고민이 깊다. 이미 2017년 11월 디폴트를 선언한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집중 경제 제재 탓에 국영석유사 PDVSA의 수출길이 공식적으로 막힌 상태다. 그나마 거래가 이뤄지는 주력 상품 메레이(Merey) 원유는 현물이 배럴 당 1~2달러에 거래된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말레이시아 운송 요금을 지불하고 난 후 가격이다. 메레이 원유 값은 미국 마스·영국 브렌트, 중동 원유 가격에 연동해 매겨진다. 말레이시아는 베네수엘라 원유 현물 재판매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지역이다.

지난 해 IMF로부터 42억 달러 구제 금융을 지원받기로 했던 에콰도르도 심각한 상태다. 21일 선물시장에서 주력 상품인 나포(Napo) 중질유 6월물은 WTI 6월물보다 낮은 배럴 당 6달러에 거래됐고, 오리엔테(Oriente) 중유 6월물은 4달러에 거래됐다. 이는 최종 현물 가격이 배럴당 6~9달러에 그칠 것임을 의미한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나포 중질유와 오리엔테 중유는 WTI 가격에 연동된다.

에콰도르는 IMF 구제금융 조건으로 재정 긴축을 하기로 하면서 '40년만에 에너지 보조금 폐지'를 정부가 발표했다가 지난 해 말 대규모 '냄비 시위'(거리에 냄비와 프라이팬 등을 들고 나와 두들기는 남미 특유의 시위 방식)가 이는 바람에 경제가 오히려 더 혼란을 겪었다. 시위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올해 초 코로나19가 닥친 가운데 부실한 공공 의료시스템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경제 중심지'인 과야킬 일대에서는 거리에 사망자들의 시신이 뒹구는 등 사회 혼란이 더 커진 상태다.

남미 다른 산유국인 콜롬비아와 브라질 산 원유는 가격이 브렌트 유에 연동되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으로 통했었다. 21일 까지만 해도 배럴 당 9~15달러를 오갔다. 하지만 20달러선을 간신히 지켜온 6월물 브렌트 유도 22일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장중 10%이상 폭락해 배럴 당 17.41 달러에 거래되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북미 멕시코를 비롯해 중남미 산유국은 원유 뿐 아니라 각종 원자재가 풍부한 '자원 부국'으로 꼽혀왔다. 유가가 폭등한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이나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때는 경제가 호황을 달렸지만 유가가 폭락한 2012년을 전후해 경제 침체기에 들어섰다. 유엔 산하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경제위원회(Cepal)은 코로나판데믹과 유가하락 여파 등을 이유로 멕시코와 중남미 산유국을 비롯한 지역경제가 올해 -5.3%역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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