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 시설 꽉찬데다 선물만기 겹쳐
세계 저장능력 60% 소진…현재 유조선에 1억4100만배럴
거대 석유기업 핼리버튼, 1분기에 10억달러 손실
11월 인도분은 36달러…연말에 회복 전망
국제유가가 역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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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돈을 줄테니 석유를 가져가라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석유 수요가 줄어들자, 넘쳐나는 석유를 저장할 수 없어 일시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20일(현지시각) 5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중질유(WTI)가 배럴당 -37.63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석유값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은 사상 처음이다. 석유 1배럴을 가져가면, 37.63달러를 주겠다는 것이다. 21일에도 -3.99달러를 기록하며, 이틀째 마이너스 유가를 이어갔다. 지난 17일 종가 18.27달러에서 55.90달러까지 폭락한 것이다.
이날 서부텍사스유 5월분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코로나19 여파로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원유시장의 ‘선물 만기’가 겹쳤기 때문이다. 5월 인도분이 거래 만기일 21일을 하루 앞두고 팔리지 않고 남은데다, 기존 구매자도 이를 인수를 하기보다는 6월물로 앞다퉈 갈아타는 ‘롤오버’를 했기 때문이다.
석유 저장시설이 한계에 달한 상황에서 5월분 물량을 현물로 받겠다는 선물 매수 주문이 실종되자, 가격이 마이너스로 급격히 곤두박질했다. 5월분을 저장하는 데 돈이 더 드는 상황이 발생하자, 석유를 가져가면 돈을 준다는 마이너스 가격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서부텍사스유는 내륙에서 생산되는 까닭에 저장 비용이 더 많이 든다.
현재 전 세계 석유 저장 능력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수요가 급감해 팔리지 않은 석유가 저장되면서, 68억배럴 상당의 전 세계 석유 저장 능력 중 60%가 소진된 상태라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3월말 현재 바다에 떠도는 유조선에는 약 1억900만배럴이 저장돼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석유 거래회사를 인용해 전했다. 이는 지난 17일 1억4100만배럴로 늘었다.
특히, 미국의 상황이 심각하다. <블룸버그> 통신 등을 보면, 선물시장에서 거래된 석유가 인도되는 오클라호마 쿠싱의 전략석유비축시설의 저장능력은 7600만배럴이다. 쿠싱에는 현재 2100만배럴의 여력이 있는데, 이는 미국 석유 생산량의 이틀치 분량 밖에 안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정부가 전략석유비축을 7500만배럴 더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의 전략석유비축은 6억3500만배럴이다. 문제는 석유 비축도 하루에 50만배럴 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7500만배럴을 더 비축하면서 시장에서 석유를 거둬들이려 해도, 5개월이나 걸린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석유값 회복은 연말이나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국제유가의 기준치인 브렌트유의 11월 인도분은 36.89달러, 서부텍사스유 11월분도 31.66달러였다. 이번 석유값 마이너스는 서부텍사스유 5월분에 한정된 일시적 현상이다. 서부텍사스유 6월 인도분도 18%가 떨어지는 했으나, 20.43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비록 시장 상황이 왜곡되면서 일부 품종에 한정돼 ‘마이너스 유가’ 현상이 나타났으나, 석유값이 역사적인 변곡점을 맞고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본격 확산된 3월 이후 전 세계 석유 수요는 하루 3천만배럴이나 급감했다. 약 1억배럴 내외인 전 세계 생산량의 30%에 해당하는 수요가 감축됐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오펙) 회원국과 비오펙 산유국으로 구성된 ‘오펙+’는 지난 12일 하루 970만배럴을 직접적으로 감산하고, 다른 산유국과 선진국들도 감산에 동참해 하루 최대 2천만배럴의 감산 효과를 내기로 한 바 있다. 이 합의가 지켜져도 여전히 공급이 1천만배럴이나 넘치는 상황이다.
석유 초과 공급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200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새로운 유정이 예상 이상으로 개발되고, 셰일유 등 셰일에너지가 2010년 이후 시장에 본격적으로 보급됐다. 코로나19 위기가 잦아들어도, 공급 초과로 인한 저유가 현상이 해결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현대 세계의 최대 산업 중 하나인 석유 산업과 석유 기업들의 위기도 심화되고 있다. 석유 관련 거대 장치 기업인 핼리버튼은 20일 올해 1분기 10억달러의 손실을 봤다고 보고했다. 핼리버튼은 지난해 동기에는 1억5200만달러의 흑자를 봤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전쟁 뒤 이라크 석유 개발 이권을 따낸 기업이다. 딕 체니 당시 부통령이 최고경영자로 재직한 회사로, 이라크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자 심지어 배후 조정을 했다는 의혹을 샀다.
석유값이 배럴당 20달러 이하로 조금 더 지속되면, 미국 텍사스의 수백개 중소 석유회사들은 80%가 파산하고, 25만명이 실직할 것이라고 <뉴욕타임스>가 석유업계 전문가를 인용해 전했다. 30달러대가 되면, 석유 산업은 살아남을 것이나 많은 석유기업들이 망할 것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즉, 석유값이 30달러 이하면 산업 자체가 붕괴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절박한 위기 의식 탓인지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이 5월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감산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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