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5 (월)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최영미 "운동권이여, 민주주의 그 거룩한 단어 내뱉지 말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9년만의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 출간

80년대 운동권, 여성 인권 짓밟으면서 침묵 강요

성추행 폭로한 이유? 여성들의 강요된 희생 밝히려고

“나의 가장 밑바닥, 뜨거운 분노와 슬픔, 출렁이던 기쁨의 순간들을 기록한…. 시시하고 소소하나 무언가를 만들어냈던 시대의 일기로 읽히기 바란다.”

최영미(58) 시인은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내며 이렇게 썼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을 폭로하며 ‘미투(Me too)’ 운동을 확산시킨 그의 일기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 만하다. 지난 4~5년간 신문·잡지에 발표했던 글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다듬고 엮어 9년 만의 산문집을 냈다.

조선일보

/이진한 기자 지난 2월 시집 '돼지들에게' 개정 증보판을 출간하고 기자간담회를 연 최영미 시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운동권 성추행 폭로 이유? “80년대가 여성들에게 어떤 희생 강요했는지 말하고 싶어서”

시인으로서의 고민과 치매인 어머니를 병간호하며 느낀 것들, 일상의 소소한 기록들을 진솔하고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미투 운동 이후의 글들은 주로 5장 ‘세상의 절반을 위하여’에 묶였다. 그는 2018년 2월, JTBC 뉴스룸 출연 후 쓴 글에서 “1992년 등단 이후 제가 원하지 않는 신체적 접촉(성추행)을 했던 남자는 네 명”이라고 밝히며 “권력을 쥔 남성 문인들의 이러저러한 요구를 거절했을 때, 여성 작가가 당하는 보복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했다.

문단에 나오기 전 성추행을 당했던 일들도 ‘벌레들’이란 제목의 글에서 털어놨다. 운동권 시절, 종로 일대의 대규모 시위에 참가한 후 남자 동기의 집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에 깨어나 보니, Y가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지렁이 같은 손이 또 내 옷 속을 파고들려 하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벽에 기대앉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최영미 시인은 “내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을 글로 불러오는 것은, 80년대가 여성들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했는지 말하고 싶어서다”라고 썼다. 그는 1980년대 운동권의 합숙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성추행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유명한 정치인이나 국회의원이나 법조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 성장한 그들, 명망 높은 남성 활동가들에 가려진 여성들의 고단하며 위태위태했던 일상. 선배, 동지, 남편이라는 이름의 그들에게 유린당하고 짓밟히면서도 여성들은 침묵했다. 침묵을 강요당했다. 대의를 위해서. 민주주의? 자유? 평등? 혁명? 내 앞에서 지금 그런 거룩한 단어들을 내뱉지 마시길….”

◇긴 싸움의 끝 “시대의 일기로 읽히기 바란다”

그는 1인 출판사를 설립해 지난해 신간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출간했다.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유명 출판사에 시집을 내고 싶다고 연락했지만 부담스러웠는지 답을 받지 못했다”고 직접 출판사를 차린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출판사 이름 ‘이미’는 자신의 시 제목에서 따왔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에서, 너무 아파 부끄러움도 모르고 몸을 내맡기는 환자들을 보며 떠올린 시다. “이미 슬픈 사람은/울지 않는다//이미 가진 자들은/아프지 않다//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마지막은 ‘긴 싸움의 끝’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2017년 시 ‘괴물’이 발표되고 고은 시인은 최 시인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2심까지 패소하고 결국 상고를 포기했다. 최영미 시인은 길고 외로웠던 싸움을 돌아보며 “저는 작은 바퀴 하나를 굴렸을 뿐. 그 바퀴 굴리는데 저의 온 힘을 쏟았다”고 썼다.

[백수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