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5 (월)

이슈 성착취물 실태와 수사

아동 성착취물 형량 “너무 낮다” 현직 판사들이 재검토 요청[플랫]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만일 이대로 양형기준이 마련된다면 피해자는 물론 일반 국민도 납득하기 어려운 양형기준이 될 수도 있다.”

지난 25일 대법원 젠더법연구회 소속 판사 13명이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올린 건의문 중 일부다. 이른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대법원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 만들기에 나섰다.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판사들을 상대로 이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판사들이 대법원의 양형기준 설정 작업을 두고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청한다”며 비판하는 글을 올린 것이다. 판사들이 양형기준 설정 작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향신문

사진.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양형기준이란 말 그대로 법관이 형량을 정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기준을 뜻한다. 법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형량 차이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양형인자(감경·가중)을 구체적으로 정해둔 것이다.

이를테면 강간죄의 법정형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다. 법정형을 기준으로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이라는 ‘가중요소’가 반영되면 ‘최소 징역 6년에서 최대 9년 사이’에서 형량이 정해지는 셈이다. 반면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거나, 피고인이 자수했다는 ‘감경요소’가 반영되면 ‘최소 징역 1년6월에서 최대 3년’ 내에서 감형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살인, 뇌물, 성범죄, 횡령·배임, 절도, 선거 등 20개 주요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은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제작·배포·소지한 범죄(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11조 위반)에 대한 양형기준은 아직 없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뒤늦게 양형기준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사들이 대법원의 양형기준 설정 작업에 대해 비판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법원은 지난 4일부터 13일까지 1심 판사들을 대상으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범죄의 적절한 양형 범위를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일단 판사들은 대법원이 설문조사에서 제시한 양형이 법정형이 비해 지나치게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판사들의 건의문에 따르면, 대법원 양형위는 ‘14세 여자 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영상을 제작·판매·배포한 범죄에 대해 적절한 양형을 선택해달라고 물었습니다.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제작한 범죄의 법정형은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입니다. 그런데 설문지에는 ‘징역 2년 6월~9년 이상’이 제시됐습니다.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을 영리 목적으로 판매한 죄의 법정형은 ‘징역 10년 이하’, 배포죄는 ‘징역 7년 이하’다. 설문지 양형 보기에는 ‘징역 4개월~3년 이상’이 제시됐습니다.

판사들은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범죄는 직접적인 성폭력범죄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범죄이고, 오히려 그 피해 정도가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중대한 범죄”라며 “피해자에게 가하는 피해 정도를 고려할 때 보기로 제시된 양형의 범위가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경향신문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 유포, 소지 혐의로 기소된 사건과 형량 예시. 그래픽 | 이아름 areumlee@khan.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판사들은 ‘특별감경인자’로 아동 피해자의 처벌불원이 포함됐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즉 아동 피해자와 가해자가 형사 합의를 했다는 점을 고려해 판사가 형을 깎아주는 것이 적절하냐는 것이다. 판사들은 “아동은 취약자로서 연장자의 말에 복종하기 쉽고, 아주 낮은 수준의 유인과 협박에 의해서도 성착취 피해를 가능성이 높다”며 “이러한 아동의 승낙을 유효한 승낙으로 보아 범죄 감경요소의 보기에 올릴 수 있는 것인지도 매우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아동·청소년의 경우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도 보호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판사들은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범죄 양형기준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시민 눈높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사들은 지난해 한국, 영국, 미국 등 국제 공조수사로 밝혀진 세계 최대 아동음란물 유통 사이트 ‘웰컴투비디오(W2V)’ 사건을 예로 들었다. 판사들은 “미국에서는 해당 사이트에서 영상을 한 번 내려받은 사람이 징역 70개월과 보호관찰 10년을 선고받은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1000여건을 내려받은 사람이 징역 4개월, 70건을 내려받은 사람이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며 “지금까지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진 유사 범죄에 대한 처벌은 범죄의 심각성을 반영하지 못했고, 재범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설문조사는 범죄 중대성과 피해 심각성을 제대로 고려했는지 의문이 드는 점이 많다”며 범죄의 심각성을 반영한 설문조사를 다시 진행해달라고 촉구했다. 또 시민 눈높이를 반영할 수 있도록 시민·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 절차를 마련해달라고 했다.



유설희 기자 sorry@khan.kr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