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에 ‘박사방’을 운영하며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유포한 혐의를 받는 조주빈이 25일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는 중 포토라인에 서고 있다. 강졍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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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특수나 공안을 가라고 했죠, 저처럼 성범죄 수사만 하면 승진이 안 된다고"
현직 검사 시절 성폭력 범죄를 전담했던 한 변호사는 최근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성범죄 수사가 주목을 받자 격세지감이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현직 시절 선배들이 "특수나 공안을 가라""언제까지 국·영·수 기초만 할 거냐""너처럼 성범죄 수사만 할 거면 사표를 쓰겠다"는 말을 조언처럼 해줬다고 했다. 미성년자와 성매매를 한 남성에게 징역형을 구형하자 "'실수 한번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일 있냐'는 상사의 질책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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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 못 한다" 홀대받던 성범죄 수사
모두 까마득한 옛일 같다. 하지만 2018년 미투 운동이 터지며 성범죄 수사가 주목을 받기 전까지 검찰 내부에서 성폭력 전담은 기피부서에 가까웠다. 검사들은 "최근까지도 그런 인식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관행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계기로 한 번 더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 시위 운영진들이 25일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열린 'n번방 사건 관련자 강력처벌 촉구시위 및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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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n번방 사건의 주범인 '박사' 조주빈(25)의 검찰 송치 후 서울중앙지검에 설치된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TF'를 김욱준(48) 4차장이 지휘한다는 것이다. TF팀장도 유현정(47)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이 맡았다.
범죄와 마약 수사를 담당하는 4차장은 중앙지검 1·2·3·4차장 중 가장 중요도가 떨어지는 직책으로 여겨졌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수사는 주로 공안과 특수부를 지휘했던 2·3차장의 몫이었다. 전직 대통령과 대법원장을 구속하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와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을 수사를 지휘했던 한동훈·송경호·신봉수 등도 모두 중앙지검 2·3차장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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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지검 4차장, 언론 중심에 서다
'n번방 사건'은 조 전 장관 일가 수사 못지않은 큰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수사를 4차장과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이 맡았다는 것은 성범죄 수사에 대한 검찰 내부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n번방 사건'은 추미애(62) 법무부 장관과 이성윤(58) 서울중앙지검장이 취임 뒤 온전히 맡게 된 사실상 첫 번째 중요 사건이기도 하다.
김욱준 서울중앙지검 4차장의 모습. |
검찰 각 청에선 2003년부터 성폭력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수·공안과 같이 여성·아동 범죄만을 전담으로 수사하는 '부'가 생긴 것은 그로부터 8년 뒤인 2011년이다. 첫 여성·아동범죄조사부는 서울중앙지검에 신설됐다. 2016년 대구와 광주지검에, 2년 뒤인 2018년 서울 동·남·북·서와 인천·수원지검에 각각 여성·아동범죄조사부가 설치됐다.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성범죄는 사건이 험하고 힘들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회의까지 들게 하는 수사"라며 "많은 검사가 배치받길 꺼렸다"고 말했다. 검사들이 부서 지망을 할 때 성범죄의 'ㅅ'자도 쓰지 말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돌곤 했다. 이런 분위기는 검찰 내부에서 묵묵히 성폭력 수사를 해왔던 일부 여성 검사들이 바꿔가기 시작했다. 2013년 대검으로부터 '성폭력 전문검사' 인증을 받은 박은정(48) 현 법무부 감찰담당관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서지현 검사가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처벌 강화 간담회에 참석해 이인영 원내대표의 모두발언을 듣고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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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이 촉발한 檢 내 변화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변화의 계기는 2018년 서지현(47) 검사의 폭로를 필두로 터져 나온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이었다. 성범죄에 대한 대중의 시각이 달라졌고, 성범죄 수사의 중요성이 커지게 됐다. 차장 검사 출신 변호사는 "2018년 김지은 씨 폭로로 촉발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성범죄 수사는 특수수사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수사의 중요성이 커지자 성범죄 수사에 대한 검사들의 지원도 점차 늘기 시작했다. 여성 검사 출신 변호사는 "검찰 내에 이른바 '에이스'들이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 손을 들고 오기 시작한 것도 미투 운동 이후부터였다"고 말했다. 현 서울중앙지검 1차장인 이정현(52) 차장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 출신으론 최초로 서울중앙지검 1차장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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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또 한 번의 변화 만들어낼까
검찰 내부에선 n번방 사건이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검찰 내 성범죄 수사의 중요성과 위상을 한 번 더 끌어올릴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성범죄의 범죄 형태가 과거와는 본질에서 달라졌고, 양태도 복잡·다양해졌다"며 "우수하고 전문성을 갖춘 수사 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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