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화 ㅣ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
한진그룹은 올해도 이사 선임 문제로 뜨겁다. 지난해에는 고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이사 재선임이 문제였다면, 올해는 지주회사 한진칼의 이사 선임이 뜨거운 감자다. 조현아·조원태 남매가 각각 사외이사를 포함한 이사 후보를 제안하면서 언론에서는 남매간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이번 이사 선임 경쟁의 본질이 재벌 3세 간 권력다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명분으로는 양쪽 다 지배구조 개선을 내세우고 있다. 양쪽 제안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먼저 조현아 전 부사장, 케이씨지아이(KCGI), 반도건설(3자 연합)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조 전 부사장은 경영에 나서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이사 자격을 강화하는 정관 변경도 제안했다. 이에 맞서는 조원태 회장은 본인이 이사로 나서되, 사외이사는 후보 추천 단계부터 모두 외부에 맡기고, ‘거버넌스 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주요 사안에 대해 사전 검토를 받겠다고 제안했다. 진정성과 별개로 제안만 놓고 보면 가장 큰 차이는 ‘총수 일가의 이사 선임’에 있다.
소유-경영을 철저히 분리한 ‘전문경영인 체제’와 이에 대립되는 ‘오너 경영’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소재로 활용될 만큼 해묵은 논쟁이다. 고전 영화인 <허드서커 대리인>에서부터 최근 종영한 <이태원 클라쓰>까지 여러 작품에서 소유-경영의 분리가 소재로 다뤄졌다. 영화에서도 어느 한쪽이 항상 선량한 주인공이 아니듯, 현실에서도 한쪽이 항상 정답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사업에 관해 충분한 전문성이 있는지, 총수 일가 눈치를 보지 않고 회사 이익에 전념할 만한 독립성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재벌 2세여도 자질을 인정받는다면 이사로 선임될 자격이 있다. 반면,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나 사익 편취를 위해 법을 위반하거나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이력이 있다면 이사 자격이 없다.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도 법령상 결격 사유가 있거나 기업가치나 주주권익을 침해한 이사 후보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한진칼 주주라면 이번 경영권 분쟁을 재벌가 집안싸움 같은 가십거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주주들은 조원태 회장이 지금껏 충실 의무를 소홀히 해서 기업가치를 훼손하지 않았는지, 3자 연합이 제안한 후보들이 독립성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지만, 정관 변경 안건도 양쪽의 제안을 비교해 더 나은 안건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연금이 적지만 위탁운용 중인 지분의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기로 한 것은 타당한 결정이다. 양쪽이 약속을 충실히 이행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주들이 이번 분쟁을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면, 지배구조 개선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도 올라갈 것이다. 지금처럼 지배구조 개선으로 경쟁하는 구도 역시 국민연금이 지난해 행사한 주주권의 영향이 적지 않다.
제안 자체만 보면 3자 연합 쪽이 더 과감하다. 총수 일가가 진정으로 경영에서 손을 뗀 채 전문경영인 체제를 택한 예는 그간 찾기 어려웠고, 이사회 개선을 위한 정관 변경도 3자 연합 제안이 실효성이 더 커 보인다. 언제든 우호관계가 깨질 수 있는 주주들의 연합이므로 상호 견제가 작동할지도 모른다. 반면, 조원태 회장은 기존 이사인 만큼 선대 회장의 배임죄 등에 대한 감시 의무 소홀, 한진그룹 재무구조 악화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핵심 자회사인 대한항공의 이사를 겸직하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다시금 ‘어느 쪽이 지배구조 개선에 더 큰 의지와 진정성을 갖고 있느냐’라고 생각한다. 양쪽이 이를 두고 경쟁하게 하려면, 이번 경영권 다툼을 단순히 집안싸움이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아야 한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투자자들이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길 기대한다.
▶[연재]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신문 구독신청▶삐딱한 뉴스 B딱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