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모든 것으로, 서울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입니다.
서울 미래유산의 선정기준은 1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이해하는데 현저하게 도움이 되는 것, 2 서울을 소재 또는 배경으로 하는 작품 또는 서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기념물, 3 특색있는 장소 또는 경관으로서 서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 4 서울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현저하게 도움이 되는 것 등입니다.
그 중 오늘은 경향신문사가 있는 서울 중구 지역의 미래유산 중 ‘정치역사’ 분야의 것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전부 14개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남산자락에 있는 서울소방재난본부입니다. 이곳이 선정된 이유는 과거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사무실 용도로 사용하던 건물로,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26길 52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지상 2층, 지상 6층까지 있으며 지난 시기 민주인사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이루어지던 곳 중 하나로 국가권력에 의해 인권유린이 자행되던 남산 중앙정보부 건물군 중 하나입니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네거티브 유산으로서 지난 역사의 과오를 잊지 않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어 지정됐다고 합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에는 어떤게 있을까?’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서울소방재난본부,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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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문학의 집입니다. 문학의 집은 과거 중앙정보부의 수장인 역대 중앙정보부장들(김종필, 김재규 등)의 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현재 시민 문화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1961년부터 1981년까지 역대 관저로 사용했던 중앙정보부장은 모두 11명이라고 합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문학의 집,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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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는 서울유스호스텔입니다. 서울유스호스텔은 과거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사무실로 사용하던 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로, 민주인사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이루어지던 곳입니다. 1972년 준공되어 중앙정보부 및 국가안전기획부 본관으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1층에서 6층까지 행정 사무실로 이용되었고 6층에 정보부장실이 있었습니다. 1995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겨간 뒤, 1997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3년 소방방재본부와 서울종합방재센터 청사로 사용되다가 2006년 리모델링한 후 서울유스호스텔로 개장했습니다. 2009년 3월, 서울시가 국가안전기획부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남산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추진하려 했으나, 일제가 국권을 피탈한 장소인 통감부(統監府) 터가 발견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서울유스호스텔,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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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는 서울종합방재센터입니다. 옛 안전기획부 제6별관으로 사용된 곳으로 2002년부터 서울종합방재센터 종합상황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제6별관으로 사용된 건물로 악명 높은 취조실(고문이 일어나던 현장)이 있던 현장이자 중앙정보부, 안기부의 위세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서울종합방재센터 주변에는 과거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사용하던 건물 10여 채가 산재해 있습니다. 제6별관 시절 서울종합방재센터 건물은 국가안전기획부 본관(현 서울유스호스텔)과 100m의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어 통행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에는 어떤게 있을까?’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서울종합방재센터,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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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는 구 서울시청 남산별관입니다. 구 서울시청 남산별관 건물은 과거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피의자에 대한 취조 용도로 사용하던 제5별관 건물로, 서울특별시 중구 삼일대로 231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지하 2층, 지상 4층까지 있는 건물로, 지난 시기 민주인사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이루어지던 곳이며 특히 조작간첩 사건을 수사하던 건물입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구 서울시청 남산별관,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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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서울시청 남산별관,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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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는 명동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YWCA 건물입니다. YWCA위장결혼식사건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회관이 있던 자리입니다. 한국YWCA는 1922년에 창립되어 계몽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복지운동, 평화운동 등을 펼쳐왔습니다. YWCA위장결혼식사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탄생, 1987년 6월 10일 범국민규탄대회,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을 비롯, 6·26평화대행진 등 전국적인 반독재 국민항쟁을 조직하여 집권세력으로부터 ‘6·29선언’을 하게 했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건물은 1967년 건립되어 1999년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현재의 지하1층, 지상6층의 YWCA 건물을 신축했습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YWCA,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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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는 오장동 서울제일교회입니다. 오장동 서울제일교회는 1953년 5월 이기병(李基炳) 목사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월남한 신도 10여 명이 모여 설립한 교회로, 서울특별시 중구 마른내로 120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울제일교회는 1970년대 이후 유신체제와 신군부에 맞서 싸움으로써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구심이 된 교회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소속이라고 합니다. 서울제일교회의 초기 신도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온 실향민들로 교회의 활동은 이들의 정착을 돕고 지원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서울제일교회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72년 도시빈민선교 운동가인 박형규(朴炯圭) 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라는군요. 1973년 ‘남산부활절예배’ 사건을 비롯하여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등에 박형규 목사가 연루, 투옥된 것을 계기로 서울제일교회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 박형규 목사와 신도들은 폭력배를 동원한 공안당국의 방해로 1984년 12월부터 1991년 11월까지 교회에서 쫓겨나 7년간 매주 일요일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노상예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는군요. 서울제일교회 건물은 1978년에 준공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연면적 1,645.26㎡ 규모입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오장동 서울제일교회,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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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번째는 남대문시장에 있는 상동교회(구 새로나백화점) 건물입니다. 1886년 미국감리교회에서 파송된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선교사가 현재 정동제일교회 자리에 정동병원을 설립하면서 병원선교를 시작해 조선 명종 때 상진대감이 살던 집이라고 해서 교회이름을 상동이라 정하고 1888년에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해 병원은 남대문 근처 상동으로 옮겼고 1895년에 정동병원을 상동병원으로 통합하면서 교회와 병원을 분리했습니다. 상동교회는 병원으로만 사용했고 교회는 달성궁(현 한국은행 자리)으로 이전했습니다. 1898년에 전덕기가 입교하고 엡윗 청년회를 조직했으며 1900년 7월 상동병원이 세브란스병원과 통합되자 그 자리에 현대식 교회건물을 신축하여 1901년 6월에 교회를 재이전 했다고 합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어깨에 도끼를 메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하며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벌였다고도 합니다. 대표인물이 전덕기 목사, 백범 김구(金九) 최재학, 이준(李儁), 이동녕이며 이후 독립투사들이 교회에 자주 모였고, 1907년에는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 특사사건을 모의했으며 같은 해 같은 장소에서 안창호, 윤치호 등이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1911년 전덕기 목사(全德基, 1875년 ~ 1914년)는 105인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그 후유증으로 인해 1914년에 숨을 거두었으나 이후에도 교회는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을 주도했던 민족 대표 33인 중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4명이 상동교회 출신이었습니다. 1944년에 교회가 폐쇄되고 일제의 신사참배와 소위 황도정신(皇道精神)의 훈련장인 황도문화관으로 바뀌는 수난을 겪었으나 1945년 8·15광복 후 흩어졌던 교인들이 다시 모여 교회를 재건했습니다. 1977년에 철근콘크리트조, 지하2층, 지상9층의 현 건물을 준공하여 새로나백화점을 설립하여 경영해 오다가 1998년 IMF 전후로 새로나백화점을 폐점한 후 일반 상가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상동교회(구 새로나백화점),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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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는 정동 중화기독교 한성교회입니다. 중화기독교 한성교회는 1912년 더밍(C.S. Derming)과 처다오신(車道心)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교교회로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8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화기독교 한성교회는 중국 저장성에서 출생한 여선교사 더밍이 남편을 따라 1911년 한국으로 오면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더밍은 원래 중국 선교를 희망하였으나 남편의 선교지인 한국에서 화교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인물로 중국인 한의사 처다오신과 함께 1912년 5월 YMCA의 방 한켠을 빌려 집회를 갖게 된 것이 한성교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한성교회는 1913년 서소문에 교회를 얻어 독립하고 리커봉(李可鳳)을 초대 목사로 초빙했다고 합니다. 1960년에 준공된 철근콘크리트조의 지하 2층 지상 5층 건축물로 건축면적 631.28㎡에 연면적은 3,161.7㎡이라고 합니다. 2012년 교회 건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서울미래유산 중구 정치역사편 중화기독교 한성교회, /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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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태평로 도로원표와 한국은행 앞 광장, 한양공원 비, 구 경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와 서울광장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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