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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글로컬 라이프] 러시아 학부모도 뿔나게 한 학교 평준화… "차라리 소련 때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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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권순완 모스크바 특파원


지난 1일 오전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 소콜니키 공원. 150여 명의 학부모들이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사진〉. 이들은 '교육 수호' '학교(를 지키는 것)는 우리의 일이다' 등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한 참가자가 연단에 올라 "학교 통폐합(평준화)은 학교를 군대처럼 만들고 있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집회에 참가한 두 아이의 아빠 드미트리(46)씨는 기자에게 "내년에 작은딸이 학교에 들어가는데 획일화되는 교육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요즘 러시아에선 정부가 '교육 평준화'를 위해 추진하는 학교 통폐합이 학부모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시콜라'라고 불리는 러시아 학교는 11학년제로, 한국의 초·중·고교를 합친 개념이다. 우수한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가 합쳐지게 되자 학부모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침해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의 학교 통폐합은 2010년 시작됐다. 모스크바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한을 정하지 않고 진행 중이다. 모스크바의 경우 2011년 4000여 곳이던 학교가 작년 537곳으로 줄었다. 인근에 있는 학교 여러 곳이 건물과 시설은 그대로 두고 행정적으로 통합되는 방식이다. 통합 과정에서 학급당 학생 수는 변화가 없지만, 여러 학교를 총괄하는 교장 자리가 신설되고 '총괄 교장'하에 교과 과정과 재정이 일원화되고 있다.

조선일보

학교 통폐합 목표는 '교육 불평등 해소'다. 학교마다 교사의 질이나 재정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학교를 하나로 묶으면 해결된다는 논리다. 이 과정에서 전체 학교의 10~20% 정도이던 리체이(특성화 학교), 김나지야(기숙형 학교) 등 한국의 특목고 같은 엘리트 학교가 일반 학교와 합쳐진다. 일반 시콜라 중에서도 명문 학교가 그렇지 못한 학교와 통합된다.

학부모들은 '하향 평준화'를 우려하고 있다. 엘리트·명문 학교가 다양하게 운영하던 심화 수업이나 방과 후 서클 활동 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부 학교에선 통폐합 과정에서 교사 수를 줄여 교육의 질이 낮아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내세우는 불평등 해소는 명분일 뿐이고 실제 목적은 학교에 대한 관료제적 통제 강화라고 주장한다. 통폐합 과정에서 총괄 교장이 낙하산으로 임명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선 집회의 자유에 대한 통제가 강력한 탓에 일반인은 반정부 운동에 소극적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만큼은 부모들이 자식 걱정에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선다. 집회가 자주 열리고, 법원에 학교 통폐합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내기도 한다. 이날 모스크바 소콜니키 공원 집회에서도 참가자들은 거리낌 없이 교육 행정에 대해 "부끄럽다(позор·포조르)!"라고 외쳤다.

푸틴의 학교 통폐합 정책이 구(舊) 소련 때 교육정책만도 못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소련 시절엔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대부분 학교에 예산과 교사가 균등하게 분배됐다. 하지만 그때에도 과학·외국어·예술 영재들을 위한 소수의 특별 학교가 있었다. 이곳 졸업생들은 명문 대학을 거쳐 당 간부, 외교관이나 학자 등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1957년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을 때 엘리트 과학 교육의 쾌거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러시아 공산당 당원 알렉세이(29)씨는 "소련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엘리트 교육만은 건드리지 않았다"며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고 했다. 학교 평준화 정책은 철권통치의 나라에서도 역풍을 맞고 있다.

[권순완 모스크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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