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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106] 봄도 없이 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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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도 없이 삼월 사람이 사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무릎보다 낮은 반지하 쪽창에 핀, 손바닥만 한 보행기 신발과 앞코 해진 운동화

봄빛을 모아 출렁이는 두 켤레 꽃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봄도 없이 그 앞을 지나던 수백의 연분홍 맨발들도 한 번씩 발을 넣어보겠습니다

얼굴 없는 걸음들이 지나칠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햇살 미끄러지는 아이의 잠을 덮겠습니다

봄이 혼자만 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햇살에 힘줄이 돋습니다

―김병호(1971~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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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니 벌써 서울에도 매화꽃 만발했습니다만 가만 서서 웃으며 바라볼 여유는 없습니다. 꽃 얘기, 봄 소식 맘 놓고 나누지도 못하는 삼월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올해처럼 실감하기도 처음입니다.

가난한 골목에는 반지하의 삶들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시선이 잘 가지 않으니 거기가 사람이 사는 곳인지, 창고인지 무심할 뿐입니다. 한데 어느 날 보니 무릎 아래 작은 창틀에 ‘보행기 신발’과 ‘해진 운동화’가 햇빛에 마르고 있습니다. ‘쪽창에 핀’ ‘봄빛을 모아 출렁이는 두 켤레 꽃’입니다. 이제 막 걷기를 배우는 아기와 그의 젊은 아빠의 것일 터. 매해 봄이 와도 봄을 실감하기 어려운 삶의 그 골목 사람들, 그 ‘두 켤레 꽃’을 발견하고는 ‘연분홍 맨발’의 마음이 되어 ‘꽃’에 ‘발을 넣어’ 보고는 잊었던 미소를 띱니다. 가던 걸음도 조금 더뎌질 겁니다. 사뿐한 잠깐의 봄 신발입니다. 꼭 오고야 말 봄의 징표이고 희망의 악보입니다. 그 창 아래에 사람이 사는지 몰랐던 것 참으로 미안합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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