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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조선일보 前 영업국장 "일본 敗亡한다"… '단파방송 수신 사건'의 첫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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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문석준, 美정부 방송 'VOA' 청취…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 옥사

조선일보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12월 서울 청진동 변호사 사무실. 문석준(1894~1944·사진) 조선일보 전 영업국장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허헌 변호사 등이 술자리를 가졌다. 이날 허 변호사는 일제의 전황(戰況) 선전과는 사뭇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전하는 대일(對日) 방송에 의하면, 미국과 영국이 승전할 것이기 때문에 조선 동포는 독립을 기다렸다가 기회가 오면 궐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미 정부의 해외 선전 방송인 '미국의 소리(VOA)'를 단파(短波) 방송으로 청취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 경찰은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경성방송국 직원들과 함상훈 조선일보 전 편집국장 등 300여 명이 검거되거나 조사받은 이 사건을 '단파방송 수신 사건'이라고 부른다. 문석준 역시 1943년 7월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이듬해 1월 세상을 떠났다. 타계 직전 형무소에서는 '영양장애와 각기병, 빈혈로 얼굴·다리에 부기가 있으며 보행이 어렵다'는 진단서를 보냈다. 재판부는 뒤늦게 보석을 허락했지만 하루 뒤 숨을 거뒀다. 사실상 고문에 의한 옥사(獄死)로, '단파방송 수신 사건'의 첫 희생자였다.

문석준은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33년 2월 조선일보 서무부장으로 임명돼 판매·영업국장을 역임했다. 계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뒤 혁신 기념호를 발간하고 신축 사옥을 짓는 등 혁신에 나선 때였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문석준은 방응모가 사세를 비약적으로 확장하던 시기에 영업을 총괄한 최측근 참모였다"고 했다. 역사학자이기도 한 문석준은 '조선역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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