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9 (토)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이 풍진 세상에도 봄은 옵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참혹한 교통사고로 두 눈 잃은 화가의 그림에 노란 햇살 일렁입니다

눈 감고 다시 세상을 보니 돈과 권력과 부귀영화는 일장춘몽일 뿐

가난한 풍경 한 점이 위로 된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겁니다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장


겨우내 눈바람 맞던 언덕 위 외딴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담장 밑 샘가엔 제비꽃 오종종 돋아나고요, 뒤꼍 갈참나무엔 연둣빛 새순이 고개를 내밉니다. 산수유 노랗게 핀 신작로를 따라 외딴집 꼬마들은 재잘재잘 학교로 가겠지요. 모처럼 마실 나온 할머니는 밭두렁에 앉아 볕바라기하고요, 찬거리 장만하러 종종걸음하는 아낙네를 누렁이 한 마리가 쫓아갑니다. 해 질 녘 강물은 왜 저리 맑고 서러운지. 나도 모르게 풍덩, 그림 속으로 뛰어듭니다.



춘천 나들이길, 호숫가 한 전람회에서 어느 무명 화가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산골 풍경이지만 화폭 가득 내리쬐는 햇살이 언 땅을 녹이듯 세파에 찌든 뜨내기의 가슴으로도 번집니다. 어린아이가 그린 양 삐뚤빼뚤하고 알록달록하지만, 그래서 재미납니다. 외딴집 가만가만 훔쳐보니 누군가 장지문 열고 나와 "뉘시오!" 물을 것도 같고요, "밥 한술 뜨고 가시라" 툇마루로 손짓할 것만 같습니다.

이 어여쁜 풍경에 한 자락 슬픔이 드리워진 이유를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림을 그린 화가 박환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빛과 어둠조차 가늠할 수 없는 1급 장애인입니다. 7년 전 교통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잃었습니다. 대수술 끝에 얼굴 절반의 감각도 사라졌습니다. 혀의 절반이 마비돼 음식 맛을 알지 못합니다. 입 주위 근육마저 굳어버려 화가의 이야기를 들을 땐 귀를 쫑긋 세워야 합니다.



아트페어(KIAF)에도 출품할 만큼 촉망받던 화가였습니다. 그림이 좋아 독학으로 공부하다 군 제대 후 30년간 그림 팔아 생계를 이었습니다. 단지 밥벌이가 아니라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 부식된 나무, 곰팡이 슨 합판을 재료로도 사용했습니다. 제법 근사한 작품이 탄생해, 코엑스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화제가 되고 그림 값도 껑충 뛰었습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젠 해외로 가야지, 자신만만해하던 차에 교통사고가 일어납니다.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얼굴이 부서지고 뇌혈관이 터졌습니다. 의사는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지만, 화가에겐 지옥이 찾아왔습니다. 새까만 암흑은 공포이자 죽음이었습니다. 그림을 못 그릴 바에야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여러 번 나쁜 마음도 먹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게만 이 고통을! 그러던 어느 날, 그림자처럼 따르며 수발하던 여동생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다시 그림을 그려보는 건 어때?"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젤 앞에 앉았습니다. 사고 후 8개월 만의 일입니다. 연필의 따뜻한 촉감, 그윽한 종이 냄새가 코끝에 닿자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더듬더듬 나무와 바위와 풀꽃과 강물을 그렸습니다. 실패의 연속입니다. 화가는 연필 대신 실로 스케치하기로 합니다. 화판에 핀을 꽂아 구도를 잡은 뒤 윤곽을 알게끔 실을 붙여가며 밑그림을 그립니다. 색칠은 붓 대신 손가락으로 합니다. 손끝에 닿는 물감의 농도를 가늠해 필요한 색을 찾아 칠합니다. 수백 수천번 실패 끝에 마침내 화폭에는 초록 나무와 둥근 집들이, 작은 꽃길과 올망졸망한 마을이 태어났습니다. 열흘이면 그렸던 그림을 이젠 두 달 만에 완성합니다. 절망이 엄습할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애창곡을 흥얼거립니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화가의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앞다퉈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린 게 맞느냐고, 한쪽 눈은 보이는 거 아니냐고. 왜 주로 봄 풍경을 그리느냐고도 묻습니다. 봄볕을 타고 퍼지던 들판의 흙내음, 얼음장 뚫고 흐르던 계곡물 사이로 와글거리던 햇살이 떠오릅니다. 한 남자는 화가의 두 손을 잡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사업에 실패해 생을 정리하려 했다던 그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열세 살 아이가 부르던 '희망가'를 듣습니다. 잘 먹고 잘살겠다 억척을 부리는 이들에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사는 이들에게, 물불 안 가리고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는 이들에게, 그리하면 희망이 족한 것이냐고 소년이 묻습니다. 화가는 말합니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려던 나의 꿈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노라, 단 1분만이라도 눈을 뜰 수 있다면 햇살을 보고 싶다고, 보이지 않아 좋은 건 사람들의 화난 얼굴이요, 내 볼품없는 그림에서 희망을 얻었다는 분들 있어 감사하다고.

살얼음처럼 위태롭고, 먼지처럼 덧없는 이 풍진 세상에도, 봄은 옵니다.

[김윤덕 문화부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