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을 폭동으로 짜 맞추려 신군부가 만들고, 왜곡 세력이 확대 재생산"
'논란 끝내자'…한국당 요구 수용, 진상규명 조사 범위에 포함
5·18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하는 지만원 씨 |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누군가의 주장대로 북한군 수백명이 1980년 5월 광주로 내려와 폭동을 선동했다면 대한민국 현대사는 다시 써야 한다"
2000년대 들어 북한군 개입설이 인터넷 게시물을 중심으로 등장했을 때 5·18 민주화운동 당사자 다수는 역사 왜곡 세력의 도발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5·18 희생자 시신이 담긴 관을 '홍어 택배'로 조롱한 극우 성향 누리꾼의 게시물쯤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소극적 대응의 틈을 타 북한군 개입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종합편성 채널 등 일부 대중 매체를 타고 점점 공공연한 화두로 떠올랐다.
급기야 5·18 당사자가 반박하고 해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닫자 적극적인 대응과 왜곡 세력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북한군 개입설 유포자'인 지만원 씨를 고소하는 5·18 당사자들 |
◇ 신군부가 꾸민 소요·사태·폭동, 낭설의 기원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시민은 어떻게 사라졌는지의 문제와는 달리 북한이 개입했느냐를 파헤치는 일은 5·18 미해결 과제가 아니다.
북한군 개입설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자 박근혜 정부 시절 정홍원 국무총리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최근 몇 년 사이 공개된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건에도 12·12 이후 서울의 봄을 거쳐 5·18에 이르는 시기 남측 정국에 개입하려는 북한의 동향은 없다.
5·18 연구자들은 항쟁을 폭동으로 짜 맞추려 한 전두환 신군부의 유언비어 조성에서 북한군 개입설이 기원했다고 풀이한다.
신군부가 생산한 유언비어는 항쟁 이후에도 수명을 이어갔다.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가 열릴 때까지 5·18은 소요, 사태, 폭동으로 불렸다.
전남대 5·18연구소는 이 시기를 민중항쟁과 폭동이 경합한 시기라고 지칭한다.
'12·12와 5·18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
신군부 세력이 처벌받고 5·18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나름의 원죄 의식 때문에 침묵하던 보수 집단이 5·18 왜곡 세력에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고 연구소는 분석했다.
인터넷이 발달하자 5·18 왜곡은 급격하게 퍼졌고 북한군 개입설을 퍼뜨리는 게시물과 동영상 등이 담론으로 확장했다.
전남대 연구소는 북한군 개입설이 등장하고 확산한 일련의 흐름이 이명박 정부 시절 본격화했다고 판단한다.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서 활동한 뉴라이트계열 단체가 조직적으로 5·18 왜곡을 주도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 '종지부 찍자'…진상규명 범위에 북한군 포함
북한군 개입 여부와 북한군 침투조작사건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원안에 담겨있지 않았다.
정치적 논쟁 끝에 뒤늦게 진상규명 범위에 포함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의결 |
자유한국당이 북한군 개입 여부도 조사하자고 요구하면서 몇 달씩 공방이 지속했다.
특별법 제정이 기약 없이 미뤄지자 5·18단체 등이 '차라리 받아들이자'로 선회했다.
한국당 주장에 공감대를 이뤘다기보다는 '낭설에 종지부를 찍을 때'라는 결단이었다.
정춘식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천번 만번 양보해서 북한군이 침투해 5·18을 주동했다면 그 지경이 되도록 당시 신군부와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고 꼬집었다.
정 회장은 "수많은 사람이 피 흘려 이룬 민주화와 표현의 자유를 왜곡 세력이 5·18을 폄훼하며 누리고 있으니 참담할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송선태 5·18진상규명조사위원장은 17일 "불필요한 논란을 끝낸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 여부 조사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h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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