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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조기현의 내 인생의 책]①개념어 사전 - 남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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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드라마 독서법

경향신문

인문학 열풍 속에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책 한 권 손에 쥔 적 없었다. 작가가 되려면 머리에 든 게 많아야 하지 않나 싶었다. 책은 책상에 ‘앉기’와 책 ‘읽기’를 할 수만 있다면 저비용 고효율로 머리를 채울 수 있었다. 철학으로 콘서트를 하거나 카페를 차리는 대중서들에 눈이 갔다. 시장에 알맞게 가공되고 꼭꼭 씹어 먹여주는 책이라 할지라도 막 독서를 시작한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됐다. 시대와 불화하는 철학자의 모습은 19살에 취업한 공장에서 적응을 못하는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돈 때문에 겪은 억울함을 지적으로 해석해보려는 시도를 촉발했다. 이제 막 철학자들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게 됐지만,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것 같았다. 비판과 계승을 통해 내 생각을 갖고 싶었다. 그런데 직접 읽은 플라톤, 칸트, 마르크스의 책은 단 한 문장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 철학과 개념을 씹어 먹고 싶은데 어떻게 씹어야 할지 헤맬 때 저술가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을 읽었다. 이 책은 으레 사전에 품는 기대를 배반한다. 남경태는 개념을 정갈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개념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둘러싼 드라마를 서술한다. 이를테면 그의 사전 속 ‘경험’은 앎에서 이성을 중시하는 견해와 경험을 중시하는 견해가 대립하다가 칸트에 의해 해소되는 드라마다.

그가 서문에서 멋쩍어한 사전이라는 표현은 이 책의 독서법에는 적확하다. 경험 다음에는 인식론이 궁금하고, 인식론 다음에는 이성이 궁금하다. 개념의 개념의 개념, 드라마에 드라마를 물고 이어지는 독서법은 종횡무진하며 스스로 생각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한다. 2014년 말, 공장에서 야근하고 기숙사에 들어와서야 그의 부고를 읽었다. 스승이 저문 느낌이었다.

조기현 | <아빠의 아빠가 됐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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