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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4 (월)

[김경은 기자의 깨알클래식] 득음을 꿈꾸며 폭포로 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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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김명곤)은 수양딸 송화(오정해)에게서 한의 소리를 끄집어내려고 눈을 서서히 멀게 한다. 송화는 산속 폭포 아래에서 피나는 수련을 해 득음의 경지에 오른다.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은 개그맨 유재석이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호흡과 발성을 연습하기 위해 붙들려 간 곳도 폭포였다. 일명 '유산슬 성대 맞춤 폭포 득음 교실'이었다.

소리꾼들이 득음을 위해 폭포 밑에서 수련했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있다. 서양음악이 몸의 구멍을 모두 열어 맑은 소리를 내는 공명을 중시하는 것과 달리 판소리는 단전호흡을 하면서 목에 핏줄이 불뚝 솟고 잔뜩 힘이 들어가 째지는 소리에 가치를 둔다. 껄껄하게 나오는 소리인 '수리성'과 거칠면서도 맑게 고음을 쳐내는 '천구성'을 가장 좋게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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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에 이어 나온 영화 '천년학'의 한 장면. 송화(오정해)가 폭포 앞에서 연습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그러려면 목을 철저히 학대해 탁하게 만들어야 한다. 성대에 상처가 좀 나더라도 점막의 허물이 벗겨지고 아물기를 반복해 굳은살을 입힌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쉬지 않고 노래해야 하는데, 성대를 딴딴히 해야만 아주 높은 소리를 아주 오랫동안 소화할 수 있다.

탁 트인 벌판, 울림 많은 동굴 대신 굳이 산속 폭포로 몰려가는 까닭은 폭포만큼 일정한 소리가 쉼 없이 울리는 곳도 드물어서다. 문승재 아주대 교수(영문학)의 음향학적 분석에 따르면 폭포는 모든 음역의 백색잡음(white noise)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높아질 때마다 6데시벨씩 작아지는데, 폭포수는 높든 낮든 쏴아아 쏟아지는 소리 크기가 일정하다. 이러한 소리를 뚫고 소리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특정 주파수에서 폭포수의 백색잡음을 뛰어넘어 목소리가 더 크게 나오는 경우가 생긴다. 소리 크기는 폭포수와 엇비슷하지만 관객들 귀에는 또렷이 들리는 '싱어스 포르만트(singer's formant·독특한 음색)' 현상이다. 자기만의 포르만트가 생기면 클래식 성악가도 100명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앞에서 자신의 소리를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과학적 이유만 있는 건 아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명창들은 "소금기 있는 바닷가에서 노래하면 아무렇지 않은데 민물가, 특히 이른 아침 물안개 피는 산에서 소리를 하면 금세 목이 쉰다"고 했다. 일부러 습기 찬 곳을 찾는단 얘기다. "힘든 데서 연습하면 공력을 얻고 기교도 야무지게 하게 돼 어디서든 자신 있게 소리할 수 있지요." '60년 소리꾼' 신영희 명창의 말이다.

[김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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