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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4 (월)

서른살 독립운동가의 혁신… 이승만 "우리 인민의 언론"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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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6] 이상재·신석우 체제의 출범

1924년 민족자본가들 도움 받아 조선일보 경영권 인수해 새출발

안재홍·이상협 등 언론인 영입… 혁신호 10만부 무료 배포도

임정 대통령 이승만·박은식과 서재필이 쓴 축하 기고문 실어

1925년 1월 1일 자 조선일보 신년호에 '동정(同情)! 환영!/ 철학박사 리승만'이란 글이 실렸다.

"재외 모든 동포는 조선일보의 새 주인 일동에게 대하야 무한한 동정을 표하며 귀 신문이 우리 인민의 언론기관이 된 것을 크게 환영합니다. 우리의 성공은 인민 단합에 있으며 인민의 단합은 사상 일치에 달렸나니 신문이 인민의 사상을 인도하기에 유일한 기관임으로 우리 목적을 속성하기에 또한 유일한 기관이라 함니다. 귀 사원 일동이 이 정신으로 이 기관을 삼었은즉 귀보(貴報)의 날로 확장됨을 믿으며 간절히 축하합니다."(1924년 11월 7일)

조선일보

1924년 9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민족지로 본격 재탄생시킨 독립운동가 신석우(작은 사진 위)와 그가 사장으로 추대한 원로 민족운동가 이상재. 큰 사진은 1925년 1월 1일 자 조선일보 신년호에 실린 이승만의 격려 기고문. 그는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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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었다. 일제가 시퍼렇게 감시하는 상황에서 이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사실상 임정 대통령의 기고였다.

이에 앞서 1924년 11월 1일 자에는 뒤에 역시 임정 대통령을 역임하는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보낸 기고문이 실렸다. 박은식은 이 글에서 "이제 조선일보가 개혁진보의 방법을 취하야 금아(今我)는 고아(古我)가 아니란 색채를 발표하니 차(此)가 곧 우리로 하야금 과거의 미도(迷塗)를 초과하고 장래의 격지(隔地)를 개척하는 전정(前程)에 일종(一種) 남침(南針)이 될 줄로 믿는다"고 했다.

또 미국에 있는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안재홍 조선일보 주필에게 보내온 편지가 1924년 11월 23·24·29일 자 1면에 연달아 게재됐다. 이 글에서 서재필은 "여(予)는 조선일보가 우리 민족의 원로인 이상재 노인과 김동성 등 제씨(諸氏)의 협동 조직한 새 기관으로 넘어갔단 말을 듣고 이 노소(老少) 협동한 조직이 조선일보가 장래 조선 민중의 유력한 기관이 될 표징인 줄로 알았노라"고 했다.

대표적인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앞다퉈 조선일보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글을 기고한 것은 1924년 9월 23일 조선일보의 경영권이 서른살의 젊은 독립운동가 신석우에게 넘어간 데 따른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발의했고 임시의정원 의원과 교통총장을 역임한 신석우는 귀국하여 의정부의 대지주였던 부친을 설득해 송병준에게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그는 '민족의 사표(師表)'로 존경받던 원로 민족운동가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또 편집 겸 발행인 김동성, 주필 안재홍, 고문 이상협, 인쇄인 김형원, 편집국장 민태원 등 당시 대표적인 언론인을 대거 영입했다. 전임 사장 남궁훈의 지도 아래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조선일보는 이제 한층 강화된 진용으로 '조선 민중의 신문'을 표방하고 1924년 10월 3일 자로 혁신호 10만부를 발행하여 무료 배포하는 등 의욕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신석우가 혼자 힘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권유에 따라 민족자본가들이 동참했다. 일제 총독부의 비밀 자료에 따르면 조선일보 인수 당시 신석우가 6만원, 최선익이 8만원, 조설현이 3만원, 신구범이 3만원을 출자했다. 최선익은 또 견지동에 새로 지은 자기 건물을 조선일보에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이들은 취체역(이사)으로 조선일보 경영에 참여했다. 신석우는 훗날 잡지 '개벽'에 실은 글에서 "나는 돈을 얼마를 썼든지 내가 쓴 것이니까 별로 관계가 없는 일이나 나로 인하야 다른 사람들이 신문에 돈을 많이 소비한 것이 퍽 미안하다"며 조선일보를 7년간 운영하면서 본인이 42만원, 최선익이 27만원, 조설현이 5만6000원을 썼다고 했다.

'민족지'로서 조선일보의 본격 재탄생은 이처럼 민족운동가와 민족자본가들이 합작한 것이었다.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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