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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東語西話] '虎溪三笑'를 재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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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아침 일찍 '3·1 독립운동100주년' 관계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머물고 있는 조계사 일주문을 나섰다. 1년 내내 수시로 7시 30분 조찬 모임을 가졌다. 불교·천도교·개신교 종교인 만남이 잦아질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언어가 생활화되어 간다. 물론 가끔 가치관 차이로 눈에 보이지 않는 뼈 있는 농담이 오가기도 하지만. 겨울 추위로 옷깃을 여미고 마스크를 한 채 걸으니 눈썹에서 물기가 뚝 떨어진다.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부지런한 도회인들 사이에 섞여 종로 길을 가로질렀다. 지난번 회의에서 사소한 일로 목소리를 돋우었던 일이 마음 한편에 켕긴 탓인지 청계천 다리를 건너다가 문득 오래전에 다녀온 호계(虎溪)가 생각났다. 거기에는 종교 화합의 원조인 동진(東晉) 시대 혜원(慧遠·334~416) 스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장시(江西)성 루산(廬山) 동림사에서 '그림자는 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발걸음은 속세에 물들이지 않겠다(影不出山 跡不入俗)'는 다짐으로 어귀에 있는 개울물을 철조망 삼아 30년 동안 스스로를 산에 가두었다. 어느 날 도연명(陶淵明·유교), 육수정(陸修靜·도교)이 찾아왔다. 배웅하다가 대화 삼매에 빠져 마지노선인 개천을 넘어가는 줄도 몰랐다. 깜짝 놀란 것은 호랑이다. 집을 지키는 반려견처럼 주인이 산문 밖을 나가자 큰 소리로 울었다. 아차! 하며 당신의 좌우명을 한순간 어긴 사실을 알고서 두 사람에게 말했더니 모두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 계곡은 호계(虎溪)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호계삼소(虎溪三笑·호계에서 3명이 함께 웃었다)는 종교 화합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뒷날 문인화가들의 그림 소재로 더러 등장하곤 했다.

동쪽 이웃 섬나라 역시 신도(神道)와 불교가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화합하면서 밀고 당기는 세월을 거쳤다. 특히 국가적 행사에는 가끔 자리를 함께했다. 그러던 중 신도가 주관하는 행사에 불교가 참여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주최 측에서 신도 행사이니 승복이 아니라 신관(神官) 복장으로 행사를 보좌해달라는 전갈이 왔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도쿠온 쇼주(獨園承珠·1815~1895) 선사는 "그렇게 할 터이니 앞으로 불교가 주관하는 국가 행사에는 당신들도 승복을 입고 삭발한 후 참석해달라"는 역제안을 했다. 결국 없었던 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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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교는 공존을 위한 묘책을 찾았다. 그리하여 신사(神社)의 여러 신은 모두 석가모니가 일본 땅에 화현한 것이라는 신불습합설(神佛習合說)이 출현했다. 그리하여 '신사 속의 사찰, 사찰 속의 신사'가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했다. 도교와 불교의 다툼이 심했던 중원(中原) 지역 역시 많은 수업료를 지불한 후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 등장했다. 노자가 인도(胡)로 가서 석가모니로 태어났다는 설로 타협한 것이다.

그 호계의 지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항상 필요했다. 100년 전 한반도에서는 사상적 기반과 토양이 전혀 다른 불교·천도교·개신교가 함께 힘을 모아 1919년 삼일독립선언을 주도했다. 그 후계자들이 100년 후에 다시 모였고 기념사업을 하면서 사소한 갈등이 있을 때마다 호계삼소의 지혜로 풀었다. 그 결과 2019년 11월 19일 삼일운동 관계 자료를 망라한 8권 분량의 자료집 봉정식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12월 23일에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종로 태화관 터에서 세 종교인들의 정성을 모아 조성한 '3·1운동1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호계삼소의 전통은 이렇게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리라.

[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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