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세상읽기] ‘소득주도빈곤’이라고? / 주상영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주상영 ㅣ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하버드대의 로버트 배로 교수는 며칠 전 한 경제지에 보낸 특별기고문에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소득주도성장’이라기보다 ‘소득주도빈곤’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혹평했다. 또한 확장적인 재정정책을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거대한 케인스주의 실험인데, 잘못된 분석에 근거한 것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배로는 보수 성향의 거시경제학자로 노벨상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저명인사다. 그런데 그가 기고문에서 선보인 분석은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10개국의 경제성장률, 투자증가율, 수출증가율을 비교하는 정도다. 경제발전 단계가 다른 국가들을 그냥 아시아 국가로 한데 묶어 관찰했다. 현재 한국 경제의 성과를 중국, 인도, 일본 등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피상적 관찰에 이어 바로 논리적 비약이 시작된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이다.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근로시간 제한 등), 복지지출의 확대(단기 공공일자리 확대 포함), 그리고 기업과 고소득층에 대한 세율 인상 등이다. 이런 정책이 투자와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분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기고문의 마지막에서 언급한 내용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한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가난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부자에서 빈민으로 소득을 재분배한 데서 나오지 않았고 전체적 경제성장에서 나왔다는 대목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왜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아직도 빈곤 탈출과 고도성장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의 경제적 성과를 흥청망청 낭비하고 있다는 자극적인 언사에는 조롱과 비하, 낙인찍기의 속내까지 느껴진다. 노인에게 매달 25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단기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낭비인지. 이것은 국민연금제도를 너무 늦게(1980년대 말) 도입한 탓에 지금에 와서 어쩔 수 없이 치르는 대가인데 말이다. 대표적 사회안전망인 고용보험제도는 1990년대 중반에 겨우 도입됐다.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고 복지와 공정거래 등 선진국 제도를 조금씩 추격해서 지속가능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것이 왜 성장을 포기한 포퓰리즘인지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배로 교수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소득주도성장을 평가하는 학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세계화와 발전전략 국장을 맡고 있는 리처드 코줄라이트 박사다. 그가 ‘세계가 바라본 한국의 소득주도성장’ 국제콘퍼런스에서 한 기조연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노동시장 유연화가 경쟁력 증진과 민간투자 촉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념은 환상이라며, 오늘날 세계경제의 성장과 발전을 제약하고 있는 요인으로 노동소득분배율의 하락과 공공지출의 둔화를 지적했다. 그리고 소득주도성장을 지지할 만한 실증분석 결과를 자세히 소개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가 개발한 글로벌 정책 모형에 따르면, 임금소득의 증가가 생산적 투자를 촉진하는 데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한국의 경우 노동소득분배율이 1% 증가할 때 경제성장률이 0.22% 증가한다. 최저임금의 인상뿐만 아니라 사회서비스, 교육, 인프라 분야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고용집약적인 프로젝트는 임금 상승에 효과적이며, 공적 이전지출과 사회보장지출 체계의 강화는 소비의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총수요를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또한 총수요가 취약한 시기에 재정지출은 민간투자와 소비 증가를 견인할 수 있는 유일한 외생적 도구인데, 유엔 모형에 따르면 모든 나라에서 재정지출승수는 1보다 높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1.3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민간투자가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시야를 갖는 반면, 정부의 재정지출은 인프라 투자, 녹색 기술, 연구개발(R&D) 등 장기적 성과를 내는 영역으로 자원을 재배치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배로 교수와 코줄라이트 국장, 누구의 말이 맞을까. 노동소득분배율, 재정승수, 소득주도성장 등의 개념이 다 쓸데없다고 치자. 그러면 노동시장과 교육제도를 최대한 유연하게 해서 유능한 기업가와 과학자만 많이 만들어내면 낙수효과로 경제가 저절로 굴러갈까.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바라볼 때 낙수효과보다는 승자독식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페북에서 한겨레와 만나요~
▶신문 보는 당신은 핵인싸!▶7분이면 뉴스 끝! 7분컷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