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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간판이 말해주는 도시의 실체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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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울 시내 거리에 있는 가게 간판들이 밝게 켜져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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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진 | 프랑스 국립 건축가



여행 작가들 사이 유명한 말이 있다. “로마에 일주일 가보고는 몇 권의 책이라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산다면 한 페이지의 글도 쓸 수 없다!” 한곳에 오래 살면서 겪는 일상의 반복과 인습의 축적은 그 장소 본연에 대한 객관적 관찰과 지속적 질문을 방해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습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여행자’가 되어보면 의외로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시내 유흥가와 아파트단지 상가를 뒤덮은 간판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홍콩, 뉴욕, 라스베이거스 등의 이국적인 간판 풍경에는 카메라를 들이댄다. 나는 유학을 떠났다 몇년 만에 돌아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고향 서울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한다. 도시를 뒤덮은 간판이 화려함이 아니라 절규라는 사실이 그제야 보였기 때문이다.



현대도시와 도시간판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한 것은 간판의 종주국 미국의 건축학자였다.(‘라스베이거스의 교훈’, 로버트 벤투리) 전통적인 도시에는 눈에 띄는 간판이 필요 없었다. 시민 대부분 그곳에 오래 살아온 거주민들이라 굳이 큰 간판을 건물에 붙이지 않아도 그곳이 은행인지 관공서인지 알게 마련이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처럼 자동차로 들른 외지인이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 도시 맥락은 와해된다. 각각의 건물은 자신의 상업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시각적 상징성’을 가지려 할 것이고, 과장되게 장식된 간판으로 건물의 용도를 직접 ‘말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로 지나며 길가의 건물이 어떤 곳인지 인지하는 것은 겨우 몇 초 정도이고, 그것도 비슷비슷한 풍경이 무한반복되는 상황이다. 잠시 주어진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오지 않을 ‘뜨내기’를 자기 건물로 끌어들이려면 멀리서도 잘 보이게 간판을 크게 하고, 무엇을 파는 곳인지, 그것이 지금 당사자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몇 초 만에 설득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간판이 커지다 결국, 건물이 몸소 조형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시내나 국도변에서 흔히 보는 대형 엠(M)자 조형물이나 바닷게 형태의 건물이 이런 생존경쟁의 절박함에서 잉태된 것들이다. 도시는 생존과 경쟁을 위한 상징물로 채워졌고, 그것들은 시민을 유혹해야 할 소비의 대상으로 바꿔 버렸다. ‘이웃’이 아니라 ‘소비체’가 된 시민은 그 자신 또한 도시를 오직 소비를 위해서만 사용하게 된다. 누구를 만나는 것도, 잠시 앉아서 쉬는 것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불가능해졌지만, 더 중요한 점은 아무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시 상징물은 소수가 주도하는 경쟁 논리와 전략에 의해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내일이면 다른 상징으로 대치될 것이고, 도시는 잠시 들렀다 가는 이방인과 한시적 광고판이 짧은 시간 공존하는 하루살이의 생을 이어간다. 소위 트렌드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도시 상징들은 도시 공동체의 시간과 기억을 ‘휘발성’으로 변질시켜, 세대가 달라도 같은 장소를 서로 공유하는 것 같은 도시적 경험의 축적을 말살한다. 그 많은 서울의 식당 중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맛을 공유하는 곳이 도대체 몇 군데나 될까. 거리를 점령한 화려한 간판은 강렬한 자극을 주며 시민을 집단적 기억상실증으로 이끄는 머릿속 지우개인 셈이다. 그것이 화려한 간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우리 사회와 도시의 실체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 끝없는 환각 상태의 경쟁을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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