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유리잔과 황남대총 그릇 국립경주박물관 성분 분석 결과
"두 점 모두 지중해 연안서 제작… 초원로 통해 직접 유입됐을 것"
"황금보다 유리 더 사랑한 신라… 출토지·시기 분명해 가치 높아"
1973년 신라 왕릉급 무덤인 천마총 발굴 당시 조사단 눈이 휘둥그레졌다. 높이 7.4㎝의 짙은 코발트빛 유리잔이 온전한 형태로 나왔다. 위쪽엔 촘촘한 세로 줄무늬가, 아래는 벌집 무늬가 연속으로 장식돼 있었다. 한눈에 봐도 '메이드 인 신라'가 아닌 '물 건너온' 유물이었다.
큰 사진은 보물 제620호 천마총 유리잔. 동지중해(지금의 이집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황남대총 남분 봉수형 유리병(국보 193호·아래 왼쪽)과 북분 유리잔(보물 제624호·아래 오른쪽) 등 신라 유리 용기를 전수 조사할 계획이다. /국립경주박물관 |
이후 황남대총에서도 독특한 유리병과 유리그릇들이 나왔다.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남북으로 맞붙은 국내 최대 고분. 특히 금관이 출토된 북쪽 무덤(북분)에서 나온 연노란빛 투명 그릇은 표면을 깎아 무늬를 만든 '커트 장식'이 눈길을 끌었다. 천마총·황남대총을 포함해 서봉총·금령총 등 5~6세기 신라 왕릉급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 용기는 모두 20여점. 학계에선 막연히 로마 혹은 페르시아 수입품일 것이라고 추정해 왔다. 하지만 1500년 전 저 먼 서역의 유리그릇이 어떻게 신라까지 왔는지, 신라 최고 지배층은 왜 유리를 무덤에 넣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지중해에서 생산돼 북방 초원로를 통해 신라로"
그 미스터리가 드디어 풀리기 시작했다. 지난 27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고대 유리의 세계'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천마총 유리잔(보물 제620호)과 황남대총 북분 출토 커트 장식 유리그릇의 제작지와 이동 경로가 처음 밝혀졌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지난 8월 일본 오카야마시립오리엔트미술관과 공동으로 성분 분석을 실시했더니, 두 점 모두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됐고 북방 초원로(草原路·스텝로드)를 통해 빠르게 신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두 점의 생산 지역은 달랐다. 먼저 국립경주박물관 연구팀은 "천마총 유리잔은 이집트 지역에서 제작됐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김도윤·이승은 학예연구사는 "천마총 유리잔을 형광X선 분석한 결과, 산화칼륨과 산화마그네슘 함유량이 현저히 적고 나트륨 함유량이 많았다"며 "이집트 지역에서 채굴되는 천연 탄산나트륨을 섞어 제작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위쪽에 수직선, 아래에 벌집 모양이 장식된 형태는 동지중해와 흑해 연안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기형"이라고 했다.
시카쿠 류지 오카야마시립오리엔트미술관 학예원은 "황남대총 북분 커트 장식 유리그릇은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에서 만들어진 후 흑해 연안에서 커트 장식을 추가했다"고 발표했다. 제작 시기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그는 "제작 시기와 신라 황남대총 북분에 묻힌 시기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며 "이렇게 빨리 이동하려면 중국을 경유하는 사막길 실크로드가 아니라 북방 초원로를 통해 신라로 직접 유입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금보다 유리를 더 사랑한 신라인
이날 연구자들은 "신라 무덤에서 나온 유리 용기는 출토지가 명확하고 시기가 분명해 뛰어난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미국 등 박물관이 소장한 고대 유리 용기 중엔 출처가 불분명한 도굴품이 많기 때문이다.
종합 토론 좌장을 맡은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신라인들이 황금을 사랑했지만 금은 지방 세력에도 많이 나눠준 반면 유리는 오로지 왕릉급 무덤에서만 나온다. 그만큼 애착이 강했고 귀한 수입품이었다는 얘기"라고 했다. 민병찬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당시 신라인들은 유리를 황금보다 더 귀한 보석으로 여겼다"며 "앞으로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 용기 성분을 전수조사해 제작지와 유입 시기, 이동 경로를 밝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물관은 연구 성과를 반영해 내년 9월 특별전 '고대 유리의 세계'(가제)를 연다. 천마총 유리잔과 황남대총 유리그릇은 지금도 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경주=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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