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회재 박광옥 학술대회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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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행정안전부는 광주 남구 칠석동에서 백운동 동아병원 앞까지 이어지는 4~6차선 도로를 ‘회재로(懷齋路)’로 명명했다. 길이 12.98㎞로 광주에서 가장 긴 도로다. 이 도로가 시작되는 전남 나주시 남평읍까지 확장하면 총 연장은 15.534㎞에 달한다.
그러나 이 도로가 어찌 회재로로 불리게 됐는지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명명의 연원은 조선시대 중기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일으킨 회재 박광옥(1526~1593)이다. 10년 전 도로명을 고시했던 정부는 “광주 출신인 회재 박광옥 선생의 충의정신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서 그의 호를 따서 회재로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가 ‘의향(義鄕)’ 광주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걸 방증한 셈이다.
그런 그의 삶과 충절, 학행을 다루는 학술대회가 22일 오후 광주향교 유림회관에서 열린다.
회재 박광옥은 관직을 그만 두고 낙향한 지 3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고령(당시 67세)으로 직접 전장에 나설 수 없게 되자, 사재를 털어 ‘의병도청(義兵都廳)’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모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권율의 ‘이치전투’와 ‘행주산성’의 전투 당시 연고가 없는 전라도 의병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는 회재가 이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선조는 그를 “호남의 충의신(忠義臣)”이라고 극찬하고 나주목사로 제수했다.
박광옥은 낙향 후 서당을 세우고 향교 중수에 참여하는 등 지방 교육 발전에도 힘을 썼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고봉 기대승(1527~1572)과도 학문을 논하고 우정을 쌓았다. 그는 특히 당대 호남의 3대 갑부 중 한 명이었지만 재산을 불리기보다 그것으로 구휼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뒀다. 실제 그는 매월ㆍ벽진마을 백성들이 가뭄으로 고통 받자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둑을 쌓아 ‘개산방죽’을 만들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임진왜란 당시 그의 호국충정과 구휼정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모습으로 이뤄졌는지, 그 삶 속에서 학문과 사유는 어떻게 완성됐는지 등을 심층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이상식 전남대 명예교수가 ‘임진왜란과 호남의병’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김만호 광주전남연구원 연구위원이 ‘회재 박광옥의 의병활동과 추승’을 놓고 주제 발표한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박상배 음성 박씨 종친회장은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회재 박광옥 선생의 삶과 학행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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