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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6·25 피란 예술인의 사랑방' 향촌동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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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향촌동 랩소디' 펴낸 이하석 대구문학관장

"산업화 이후 섬처럼 고립됐다가 지금은 관광 상품 돼 안타까워"

"대구 시민들에게 향촌동(香村洞)은 남다른 공간이다. 조선시대엔 경상감영이 있었던 중심부였고, 일제 강점기엔 번화가였지만, 6·25 때는 서울에선 피란 온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낭만의 동네였다."

이하석(71) 시인이 최근 시집 '향촌동 랩소디'(시와 시학)를 냈다. 향촌동의 어제와 오늘을 노래한 연작시 25편으로 오롯이 한 권의 시집을 낸 것. 그는 산업화 사회의 폐기물 풍경을 섬세한 언어로 비판한 시집 '투명한 속'을 비롯한 창작 활동으로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받으면서 대구 시단(詩壇)을 이끌어왔다. 그는 지난해부터 대구문학관장을 맡고 있다.

조선일보

향촌동을 거닐던 이하석 대구문학관장은 “단일 주제로 얇게 내는 시집을 기획하다가 향촌동을 주제로 한 연작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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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장은 '대구의 중심이라는 기억을 꼭, 쥔다/ 추억의 치우친 골짜기이면서/ 골목들 여전히 얽힌 걸 풀지 않아서/ 이곳에 들면 뉘든/ 서로 더 구불구불 통한다'라고 노래한 뒤 '예술가들 술기운 우거져/ 방목되던 바람지대이자/ 구름지대/ 외따른 그런 역사(歷史)로/ 여전히 산 골목으로 지피는/ 중심의 방언들'이라며 향촌동을 예찬했다. 향촌동은 1950년대 문화예술의 공간이었다.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가 있었고, 전봉건 시인이 DJ였을 뿐 아니라 숱한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다고 한다.

이 관장은 '1952년 겨울은 그 밖에서 추웠지만,/ 늘 새로 오래 긁힌 음반을 골동품 축음기로/ 무조르스키를 재생했다네'라며 '르네상스'를 상상력으로 재현한 뒤 '전쟁중이었네/ 그 음악의 성소(聖所)는/ 어떤 기도로 피우는 향이 자욱했던가/ 담배 연기는 어떻게 시인들의 몸을 발효시키고/ 말들을 허공으로만 분산시켰던가'라고 노래했다. 전쟁 중엔 서울에서 내려온 시인 서정주·박목월·박두진·조지훈·구상, 소설가 김동리·황순원·최정희 등이 향촌동에서 '피란 문단'을 형성했다.

구상 시인과 절친했던 화가 이중섭도 향촌동에 머물렀다. 이 관장은 시 '이중섭'을 통해 '경복여관에 묵으며 은지화를 그렸다네/ 여관 가까운 백록다방 구석에서도 은종이에 심화(心畵)를 새겼다네'라며 '지금도 아프게 지펴지는,/ 그리움이 은빛처럼 펼쳐지던 풍경'이라고 읊었다.

그는 "문화 중심지였던 향촌동은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대구의 발전에 뒤처진 채 섬처럼 고립된 곳이 됐다"면서 "좁은 골목엔 노인들의 사교장인 성인텍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하지만 근대의 추억이 관광 상품이 되는 시대를 맞아 변화의 물결이 향촌동에도 밀어닥쳤다. 일본식 건물이나 한옥을 개조한 카페와 갤러리, 개성 있는 소형 서점이 잇달아 생겼다는 것. 이 관장은 '우리 추억의 실핏줄이여'라며 향수(鄕愁)를 토로했지만, 새 물결에 편승한 부동산 가격 폭등의 부작용도 지적했다. '근대화의 거리가 되면서 오르는 전셋값 감당/ 못해 더 후미진 동네로 이사가는/ 할머니가 또 되돌아보네.' 그는 "향촌동은 대구의 나이든 사람들에겐 그 자체가 아련한 곳"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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