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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아이와 후원자를 이어주는 다리… 7년간 번역한 사랑의 편지 4660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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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진씨, 번역 봉사 '재능 기부'

조선일보

정여진씨가 2015년 6월 필리핀 팜팡가의 컴패션 어린이센터에서 후원자의 원본 편지와 직접 번역한 편지를 들고 후원 대상 어린이를 만나고 있다. /한국컴패션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또박또박 쓰인 편지와 그걸 영어로 번역한 편지. 주부 정여진(47)씨는 두 편지를 번갈아 보면서 한글로 옮겨 적었다. 정씨는 국제 어린이 양육 기구인 '한국컴패션'으로 들어오는 한국 후원자와 세계 각국 수혜자 사이의 편지를 번역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7년간 번역한 편지만 4660통이다.

정씨는 이른바 '경단녀(경력단절녀)'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계열사에 취직했지만, 22년 전 군인과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남편을 따라 1~2년에 한 번꼴로 이사하다 보니 고정된 직장을 갖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나서 찾은 일이 편지 번역 봉사 재능 기부다. 정씨는 "공백으로 취업이 쉽지 않았다"며 "돈을 벌지 않더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걸로 자아를 찾고 싶었다"고 했다.

무작정 인터넷에서 재능 기부를 검색했고 번역 봉사자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정씨는 "고등학교 때 프랑스어를 전공해 외국어에 친숙한 편이라 공고를 보자마자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십수 년 만에 다시 접하는 영어가 쉽지만은 않았지만, 수천 통을 번역하다 보니 이제는 영어로 된 편지뿐 아니라 스페인어, 스와힐리어로 된 후원자의 원문 편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정씨는 일주일에 평균 10통씩 번역한다. 한국컴패션 관계자는 "정씨 번역량은 다른 자원봉사자의 세 배 수준으로, 때로는 정씨가 너무 많이 가져가 다른 봉사자의 일거리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정씨는 "아이들의 순수한 편지를 보면 팍팍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고 했다. 우수 봉사자로 뽑힌 정씨는 2015년 한국컴패션의 후원을 받는 어린이가 있는 필리핀에 동행할 기회를 얻었다.

필리핀에서 다렌(당시 15세)이란 남자아이를 만난 것을 계기로 직접 후원도 시작했다. 다렌은 후원이 끊긴 아이로 정씨 아들과 또래였고 알고 보니 예전 후원자의 이름이 정씨와 같았다. 다렌은 정씨에게 "(예전) 후원자의 얼굴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정씨가 말했다. "내가 이름이 같으니 이제부터 네 후원자가 돼 주겠다. 지금 후원자 얼굴을 본 셈이니 넌 소원을 이룬 거야." 한 달에 수만원씩 후원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매주 편지를 주고받는다.

대학생이 된 정씨 자녀도 함께 번역 봉사를 하고 있다. 정씨는 "중간에서 누군가의 삶이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정말 아름답다"며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사람이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서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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