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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김창균 칼럼] “양키 고 홈” 몰고 오는 삼각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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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자정 지소미아 종료되면 미국서 “왜 한국 지켜야 하나”

"방위비 5배" 美 황당 요구에 슬금슬금 고개 드는 反美 정서

트럼프·김정은 담판도 변수… 현실로 다가오는 미군 철수

조선일보

김창균 논설주간


비관적인 전망을 안 하는 편이다. 최악 상황은 좀처럼 오지 않는 법이라고 믿어 왔다. 문재인 정부의 색깔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미국 몰아내고 김정은하고 짬짜미하려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때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독여 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불길한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 한 발자국씩 현실로 다가서는 느낌이다.

내일 자정이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이 종료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종료가 안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대통령 말은 립 서비스로 들린다. 지소미아의 겉모습은 일본과 한 협정이지만 내용은 미국과 맺은 약속이다. 한국·일본과 각각 동맹인 미국이 사이가 안 좋은 두 나라를 압박해서 하나로 묶어 놓은 새끼줄이 지소미아다. 한·미·일 삼각 안보 체제 유지를 위한 연결 고리다. 미국 국방장관이 좌우 양편에 선 한·일 국방장관의 손을 잡아끌며 "동맹(한·미), 동맹(미·일) 맞지?"라고 묻는 모습이 지소미아의 성격을 말해준다. 요 며칠 새 미국의 별 수십 개가 한국으로 날아와 지소미아를 유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20년 넘게 직업적 의무감으로 한·미 관계를 지켜봤지만 미국이 이렇게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한국에 압력을 넣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한·미 간 이견이 드러나기 전에 한국이 미국 입장에 맞춰왔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한국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동맹이나 영향권 안에 있는 나라들은 미국의 희망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게 지금의 국제 질서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미국의 강력한 요구를 못 들은 척 무시해 버리는 사태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이 지소미아를 파기하면 "미국이 왜 한국을 방어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부를 것"이라고 미국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 밖에 놓는 제2의 애치슨 선언이 나올 수 있다는 경고다. 그런데도 국가안보실장은 "지소미아 파기는 한·미 동맹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다. 주미 공사를 지낸 외교관 출신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소미아 파기 결정을 국민은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지소미아 파기 지지가 더 높게 나오는 여론조사를 믿고 하는 말이다. 안보를 정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이다. 미국에선 '어른의 축'이라고 하는 정통 안보 세력이 트럼프의 철부지 행태를 견제하는데 이 나라에선 외교·안보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정치인보다 날렵하게 정권 코드에 맞춘다.

한·미 방위비 협상은 지소미아 불길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다. 방위비 1조원을 단번에 5배로 늘리라는 미국 측 요구는 정상이 아니다. 트럼프가 처음 50억달러를 꺼낼 때만 해도 부동산 거간꾼의 흥정 수법이려니 했는데 주한 미 대사까지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50억달러'를 들이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아무리 동맹이 중요해도 50억달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미국이 끝내 요구 수준을 낮추지 않으면 국민 정서가 어떻게 흘러갈지 물어보나 마나다.

노무현 정부서 청와대 수석을 지낸 인사가 한겨레 신문 전면 광고를 "속 시원하다"며 소셜미디어에 소개했다. 광고 상단에는 "방위비 7조원이라니" 하는 제목 아래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가 요구하는 터무니없는 액수에 당혹해하는 만평이 실렸다. 하단에는 "이제부터 우리끼리"라는 제목 아래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남북 분계선을 함께 넘는 사진이 실렸다. 광고 문안에는 "그들(미군)이 가면 김정은이 쳐들어올까. 도대체 쳐들어올 수가 있을까"라고 적혀 있다. 주한 미군이 나가도 북이 남을 공격할 리 없다는 이 정권 핵심들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서 진행 중인 밀당이 또 다른 변수다. 트럼프가 “곧 만나자”고 매달리고 김정은은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오라”고 튕기는 형국이다. 탄핵 국면에 몰린 트럼프가 “한미 연합 훈련을 폐지하라”는 김정은의 요구를 수용하면 주한 미군 철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훈련 없는 군대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게 미군 당국의 확고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트럼프가 김정은이 제시한 연말 시한까지 타협하지 않아서 다시 대결 국면이 형성되면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 편에 서는 선택을 할지 모른다. 지소미아 파기, 방위비 압박에 이어 3대 전선에서 한·미가 충돌하게 된다. 어떤 경우든 “양키 고 홈” 쪽으로 물길이 흐르게 된다. 집권 세력은 반일(反日)에 이어 반미(反美) 장사로 정치적 이득을 챙길지 모르지만 나라는 그 삼각파도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김창균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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