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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이슈 미술의 세계

“실크로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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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컷 사진 담은 ‘실크로드 인문서’ 세계학자 80여명 참여한 글로벌 기획

이탈리아서 인쇄…7개 언어 동시 출간

실크로드의 미래 다룬 새책 함께 나와


한겨레

실크로드

수잔 휫필드 등 지음, 이재황 옮김/책과함께·5만3000원

인류사 최대의 광대한 네트워크, 실크로드를 다룬 교양서 3종이 함께 나왔다. 실크로드의 자연환경·유물과 유적·종교·생활 문화를 650컷의 사진 자료와 대담한 주장으로 엮은 <실크로드>, 피터 프랭코판 옥스퍼드대 비잔티움 연구센터 소장의 신작 <미래로 가는 길, 실크로드>, 그리고 2017년 한국어판이 나온 프랭코판의 밀리언셀러 <실크로드 세계사>(보급판, 3권)까지다. 모두 역사와 언어·문자 부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온 이재황 번역가가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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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손에 꼽히는 책은 225×286㎜ 판형에 2.4㎏의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실크로드>다. 7개 언어로 동시 출간된 이 책은 이탈리아에서 인쇄·제작한 4000부 한국어 한정판으로, 선명한 화질과 색감을 뽐낸다. 한눈에도 실크로드의 극적인 풍경과 인류가 쌓아올린 화려한 문명의 이미지가 돋보인다. 책과함께 인문교양팀 이정우 팀장은 “번역 부분만 한국에서 데이터를 보내고 현지에서 인쇄해 두 달이나 걸려서 얼마 전 한국에 도착했다”며 “가끔 어린이 그림책의 경우 이런 작업이 있지만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책을 외국 현지에서 인쇄해서 들여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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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총 80여명.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영국, 중국, 일본 등 학자들의 다양한 국적만큼 연구 분야도 고고학, 언어학, 미술사학, 교회사학, 건축학, 천문학까지 망라한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중앙아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세계 학계가 생산한 공통의 실크로드 지식체계를 이 한 권에 담고 계승하는 것까지 목표로 삼는 셈이다. 그러니 철학자이자 소설가였던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하고 수백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중세> 컬렉션과 비교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중세 연구 최고의 지적 결실이라 일컬어지는 <중세>는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철저히 유럽 중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에 견주면 <실크로드>는 비유럽중심의 문화공존적 시선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실크로드가 세계사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이었음을 강력하게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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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다”며 묵직하게 툭 던진 에코의 화두를 의식한 듯, 편집 총괄자인 수전 휫필드는 책의 서문에서 “‘실크로드’는 없었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사실 ‘실크로드’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었다. 실크로드는 20세기 말 이후에 널리 쓰이게 된 현대적 명칭이며 복잡한 무역 네트워크로서 서기전 200년부터 서기 1400년 사이 아프로유라시아 대륙 일대의 교역과 교류를 가리킨다. 실크로드가 “단지 신화일 뿐”이라거나 “낭만적 시기”라고 단정 지은 냉소적인 학자들의 분석이 있다시피, 그 용어의 모호성 때문에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개념 덕에 지금껏 세계사에 제대로 등재되지 못했던 민족, 문화들에 대한 시야를 확장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실크로드의 핵심은 “‘경계’를 넘는 교류”라는 것이 이 책을 통괄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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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각국 필자들의 주요 에세이를 중심으로 대초원, 사막, 해양에 이르기까지 자연환경과 ‘실크로드의 시간’을 살아갔던 사람들의 문화와 고고학적 유산을 사진과 상자 글로 소개한다. 세심하게 제작한 지도 위에 당대 사람들의 사상과 물질문화가 어디에 정착했고 어느 바다에 침몰했으며 주요 교역로를 따라 유통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고대와 중세 해양 세계에서 중요한 교역 상품 중 하나가 노예였는데, 성별 불문 노예는 실크로드 전역에서 육상과 해상 모두 빈번하게 거래되는 “돈이 되는 인간 화물”이었다고 한다. 많은 여성 노예들은 음악가와 무용수로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귀한 사진 구경 못지 않게 실크로드의 지리적 환경에서 왜 특정의 문화가 만들어졌고 발견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역사적 왜곡을 초래했는지 알게 되는 재미도 크다. 이를테면 타클라마칸사막 같은 건조한 곳에서 피륙이 더 많이 온전하게 출토되었는데 이는 자재 산지에 대한 편견을 낳았다는 것 등이다. 타림분지 고대 유적지 카라동에서 나온 방염 염색한 피륙은 영락없는 쪽빛이다. 이런 인디고 색깔은 벽화에 그려진 붓다의 외투와 같은 무늬와 색깔을 띠고 있다. 염색 장식이 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건너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같은 무늬의 무명이 홍해 항구에서도 발견된 것은 인도 피륙이 바다를 통해 서쪽으로도 수출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책은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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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라는 명칭 자체부터가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투영이란 비판도 있지만 이 책이 견지하는 시각이나 태도가 눈에 띄게 불편하거나 거슬리진 않는다. 다만 “한반도의 아이들은 이집트 유리 가마에서 만든 오색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같은 은유인지 팩트인지 모를 애매한 문장들이 가끔 눈에 띈다. 한반도 문화를 다룬 서술이 적을 뿐만 아니라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가는 부분을 볼 때, 유럽-미국 중심 시각을 대체하는 실크로드 문화사에서도 ‘변방’이 되는 것 같은 씁쓸함이 사실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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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브렉시트와 트럼프라는 상징에서 볼 수 있듯 분열과 혼돈에 휩싸인 서구와 달리 동양은 과연 새로운 협력적 관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함께 나온 책 <미래로 가는 길, 실크로드> 또한 “모든 길은 베이징으로 통한다”며 도발적인 분석으로 세계의 변화를 살핀다. 급변하는 정세 속 또 다른 새 시대를 준비해야 하기에 실크로드 이야기는 연말을 맞아 쏟아지는 어떤 미래서보다 더욱 징후적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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