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피고석…“책임 회피” 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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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무 죄도 없습니다. 14살에 일본에 끌려가 오만 고문을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재판장님, 일본이 당당하다면 이 재판에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는 일본에 죄가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법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13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3년 만에 열린 첫 재판, 이 할머니의 울음 섞인 호소가 서울중앙지법 558호 법정을 매웠다. “의자에 앉아서 말씀하시라”는 재판장의 만류도, 할머니를 부축하려는 법정 경위와 변호사의 손길도 뿌리치고 이 할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년 동안 일본 대사관 앞에서 외쳤습니다. 진상 규명, 사죄, 배상… 나이 90이 넘도록 이렇게 외치고 살았습니다. 재판장님, 현명한 재판장님, 살펴 주십시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유석동) 심리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첫 재판이 열렸다. 일본 정부 쪽이 앉아야 할 피고석은 텅 비어 있었다. 일본 정부는 재판을 거부하고 있다. 이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길원옥·이옥선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법정에 직접 출석했다. 이들은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규탄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이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1명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가 1년이 된 2016년 12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간 재판은 단 한 번도 열리지 못했다. 일본 법원에 소장이 전달돼야 소송이 시작되는데, 일본 외무성이 2017년 4월부터 세 차례 서류 접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재판을 거부하는 사이 소송에 참여한 11명의 생존 피해자 중 김복동·곽예남 할머니 등 여섯이 세상을 떴다. 결국 지난 3월 재판부가 일본 정부에 공시송달(법원 게시판에 공지해 서류가 도달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을 결정했고(<한겨레> 3월13일치 12면) 5월에 그 효력이 발생하면서 이날 첫 재판이 열리게 됐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국 법원에 제기한 소송 중 변론기일이 지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정부가 내건 재판 거부 명분은 ‘주권 침해’다. 지난 5월 일본은 ‘국제법상 주권면제(국가면제) 원칙에 따라 일본 정부가 한국의 재판권에 복종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소송이 각하돼야 한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주권면제는 국내 법원이 다른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민사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이날 재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대응 티에프 소속 이상희 변호사는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한 국제관습법은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다고 본 국제 판례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실체적인 권리를 판단하지 않는 것은 배상권 실현을 가로막아 헌법 질서에 어긋난다. 피해자 연령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지막 소송일 것 같다. 일본의 반인권적 범죄가 있었음을 사법부가 공식 확인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재판은 20여분 만에 끝났다. 피해자 쪽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한 전문가와 주권면제 이론 등을 논박할 일본 법학자 등을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다음 재판은 내년 2월 5일에 열린다.
고한솔 장예지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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