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경상도 성주의 근대전환기 100년사>(지식산업사). 이윤갑 계명대 사학과 교수가 구한말부터 4·19 혁명까지 100년간 경북 성주 지역을 무대로 일어난 사회변동과 민족운동을 살핀 책이다. “특정 지역에서 토지 소유의 장기변동을 살핀 책은 있었지만 한 지역의 100년 민족운동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책은 처음인 것 같아요.” 지난 25일 전화로 만난 이 교수에게 이번 책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한 말이다.
그의 저술에는 지난 100년 한국사의 격랑이 성주를 휩쓴 흔적이 세밀하게 담겼다. 책은 무거운 부세 부담과 지방관의 탐학을 견디다 못해 터진 농민항쟁(1862, 1893년)에서 시작한다. 동학농민전쟁(1894) 때는 성주 읍내가 잿더미가 됐다. 동학군이 일부 향리의 집을 태우다 불이 번져서다. 일본군이 개입해 끝난 성주의 동학혁명은 30년간 성장해오던 소빈농 주도의 성주 개혁운동을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단다.
동학농민항쟁부터 이승만 몰락까지
‘성주 민족운동 100년사’ 펴내
“첫 특정 지역 장기 민족운동사”
“유림도 시대 흐름 수용하며 발전”
한주 이진상(1818~1886) 학맥을 이은 성주 유림의 외교독립운동 노선도 자세히 살폈다. 1919년 유림단 독립청원서(파리장서)에 심산 김창숙 등 성주 유림 15명이 참여했다. 서명자 137명 중 군 단위로는 최다였다. 심산은 한주 아들인 한계 이승희(1847~1916) 선생의 제자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성주 유림을 이끈 분이 한계 선생이었어요.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뒤 한흥동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었죠. 망명 중에도 성주 유림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요. 성주 유림은 한계의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따랐어요. 심산은 스승 별세 뒤 유고를 정리하며 한계의 그런 생각을 알게 되었죠. 그 시절 상당수 유림은 그 노선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호남 대유) 간재 전우 등은 오랑캐 열강에게 독립을 청원할 수 없다고 했죠.”
1920년대와 30년대 민족운동 중심은 근대 사상을 일찍 받아들인 중인 출신이었다. “향리 등 중인 출신은 1910년대부터 자식들에게 근대교육을 시킵니다.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도 보내죠. 유학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들어옵니다. 반면 유림은 40년대 이후에야 근대교육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인 출신이 1920년대 이후 근대적 의미의 청년 계몽이나 실력 양성 운동을 주도합니다. 그 시절 성주 유림은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어요. 두 집단의 현실인식이 달라 1927년 신간회를 빼고는 힘을 합치는 일이 없었죠.”
사회주의 등 근대사상으로 무장한 민족부르주아 출신들은 해방 공간의 건국 투쟁도 주도했다. 하지만 이들의 무대는 한국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성주에서만 최소 90명의 보도연맹원과, 인민군 치하 부역 혐의자 48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익 40명도 인민군 치하에서 학살됐다.
한국사 연구자로서 이번 연구를 통해 얻은 게 있다면? “그동안 유림은 위정척사라는 개념에 갇혀 민족운동사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집단으로 치부됐죠. 하지만 성주 유림을 보면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며 변화 발전해나가는 모습이더군요. 예컨대 심산의 부친 김호림은 신분철폐를 앞서 실천한 진보적 지식인이었죠. 또 한주 학단은 기존 사대질서와 충돌하는 만국공법 사상을 일찍 받아들여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걸었어요.”
그는 유림의 민족운동 노선을 두고 ‘실사구시’란 표현도 썼다. “심산은 해방 공간에서 건국운동에 거리를 두고 인재 양성에 더 힘을 쏟았어요. 보편타당하고 합리적인 고등 지식을 쌓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었죠. 반면 근대 사상으로 무장한 쪽은 이념의 잣대로 세상을 보았어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죠. 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 1990년대와 비슷하죠. 그 때도 이념의 프리즘으로 현실을 왜곡해 보았죠.” 100년사 퍼즐을 맞추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해방 후 자료를 구하는 문제였단다. “일제 강점기 문헌 자료는 제법 있어요. 하지만 해방 뒤 지방을 살필 문헌 자료는 매우 취약합니다. 특히 좌익 활동을 한 집안은 자료를 다 폐기했어요. 성주읍의 유력한 사회주의 활동가 집안도 사진이고 다 태웠더군요.”
그는 1994년 연세대 사학과에서 한국 근대 상업적 농업 연구로 박사를 받았다. 학부와 석사는 서울대에서 했으나 박사는 연세대에서 마쳤다.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5년에 한국 경제사 권위자인 김용섭 교수가 서울대를 떠나 연세대로 옮겼어요. 한국사 연구 방법론으로 제대로 경제사를 공부하고 싶어 김용섭 교수를 찾아 연세대로 갔죠.”
이번 저술을 두고 30년 이상 간직한 열망의 실현이라고도 했다. “1980년대 중반 경북지역 농업변동을 연구할 때였어요. 18세기 중반에 성주 향리를 지낸 도한기 후손을 찾아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의 가족사와 지역사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이 지역 근·현대사를 연구해보고 싶은 열망이 생겼죠. 그러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의 한국전쟁 전후 성주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 조사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죠. 이 연구로 100년사를 완성했죠.”
그는 10년 이상 계명대 한국학연구원도 이끌고 있다. 연구원은 지난 10년 ‘낙중학’ 연구에 힘을 쏟았단다. 낙중학은 선산, 칠곡, 성주, 고령, 밀양 등 낙동강 중류 지역의 유학을 가리킨다. 최근 낙중학 총서 10권을 마무리했단다. “안동의 퇴계 철학 사상을 경세학 쪽으로 심화시킨 게 낙중학입니다. 지난 10년 연구로 낙중학이 이제는 학술용어로도 자리 잡고 있어요. (낙중학 다음은) 유학과 불교 등 전통사상과 현대 사회과학을 창조적으로 융합하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동양사회사상학회와 함께 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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