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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유민호의 도보여행자(Wayfarer)] [2] 99센트 에스프레소가 보여준 '비움'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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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꽂이 전문가에게 들은 동양과 서양의 꽃 장식 차이점 중 하나. 서양은 다양한 종류의 꽃을 360도 꽉꽉 채워 보여준다. 동양은 꽃과 꽃 사이 여백을 통해 자연의 신비를 전하는 데 주력한다. 전방위가 아닌, 특정 각도 전시만으로 충분하다. 채우고 메우는 과정에서 서양식 꽃꽂이는 꽃이 많이 필요하다. 동양 꽃꽂이는 꽃과 풀 하나만으로도 가능하다. 신이 창조한 자연을 가감 없이 즐기자는 것이 서(西), 인간과 꽃이 함께 창조해내는 빈 여백 속의 자연 찬미가 동(東)의 가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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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교감하는 방법으로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신을 향한 메시지인 기도, 천박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명상, 신이 창조한 자연 대면…. 흥미로운 것은 명상에 관한 것이다. 우주 원리를 알고, 삶의 의미나 가치를 다지기 위한 정신적 활동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정반대다. 아예 생각 자체를 지우고, 머리를 텅 비우는 것이 명상의 본질이다. 1993년 열반한 성철(性徹) 스님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기자가 산보에 나서는 스님에게 물었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미소와 함께 응답했다. "생각은 무슨. 아무런 생각도 안 해요."

지난 4월 시칠리아섬에서 50대 방글라데시 이민자를 만난 적이 있다. 배터리를 이용해 에스프레소를 뽑아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파는 커피 이동 판매상이다. 한 잔에 99센트. 가난한 가족을 지켜준 20년 밥줄이 에스프레소 이동 수레다. 자식들 모두 대학 보내고, 장남은 이탈리아 여자와 결혼해 손자까지 낳았다고 자랑한다.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진짜 중요한 전부를 갖고 있는 듯했다. 공짜로 얻어 마신 에스프레소 덕분에 밤잠을 설쳤지만, 비운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귀하고도 아름다운 품격을 절감했다.

서양 꽃꽂이식 삶도 중요하다. 그러나 채울 경우 계속해서 채우고 싶어진다. 비우는 데 익숙할 경우, 채워지는 하나하나에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된다. 여행은 스스로를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비우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할 최적의 기회다. 삶의 마지막 그날까지 여행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민호 퍼시픽21 아시아담당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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