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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지금도 ‘원풍’ 근로조건보다 더 좋은 곳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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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조합원 생애사 펴낸 원풍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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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민주노조의 전설로 불리는 원풍모방 노조 조합원 126명의 생애사가 담긴 책이 나왔다.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국가 폭력에 맞선 원풍 노동자 이야기>(학민사). 1천 쪽이 넘는 벽돌책이다.

원풍노조 조합원들은 1982년 9월27일 전두환 정권과 결탁한 회사의 노조 파괴 책동에 맞서 4박5일 단식 투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이들의 의지는 경찰과 구사대의 폭력에 짓밟혔고 조합원 560명이 강제해고를 당했다. 민주노조 깃발을 올린 지 10년 만이었다. ‘노조 활동을 하지 않고 회사 요구를 따르겠다’는 각서 한 장만 내도 해직을 피할 수 있었지만 650여명 조합원의 80% 이상이 각서 제출을 거부했다. 해고자 중 남자 조합원은 14명에 불과했다. 당시 군사 정권은 행정력을 총동원해 각서를 제출하지 않은 조합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노조 파괴에 나섰다. 해고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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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 노동자 150여명은 지난 19일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에 모여 출판기념회 겸 정기총회를 했다. 올해로 강제해고 37년째인 원풍 노동자들은 해마다 9월 27일 전후로 모임을 한다. 명목은 8년 전 만든 원풍동지회 정기총회다. 대략 120명 정도 모인다. 이번 책 출간도 3년 전 정기총회 의결을 거쳤다. 원풍 노동자들은 2010년(<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과 2016년(<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에도 조합원들의 생애사를 담아 책을 냈다.

“앞서 두 권은 투쟁을 이끌었던 분들이 중심이었죠. 이번 책은 평범한 조합원들의 활동과 삶을 모으자는 취지였어요. 원풍 조합원들은 다 소모임을 했어요. 그런 활동이 노조의 원동력이었거든요. 동지회 회원 200여명 중 가능한 분 중심으로 인터뷰했어요.” 지난 17일 전화로 만난 황선금 원풍동지회 회장의 말이다. 그는 동지회 회원인 양승화, 양태숙, 장남수, 지명환씨와 함께 구술 인터뷰를 해 글로 풀었다. “생산 라인별로 나눠 인터뷰 대상자를 정하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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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 시절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만나는 문장이다. 현재 대기업 협력업체 비정규직인 박춘예씨는 일하는 내내 원풍 시절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했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50대 후반인 그는 그 마음을 이렇게 풀었다. “(지금 일터에서) 동료들과 잡담도 할 수 없고 쉴 틈도 없으니, 나는 노래로 마음을 달래고 휴식을 한다. (…) 나에게 원풍노조의 의미는 내가 인간이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인간으로 존중받았던 오래된 기억의 그리움.”

지금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기성순씨는 원풍의 부부 노동자였다. 결혼 3년 만에 함께 해고의 고통을 겪었다. “당시 원풍은 산후휴가나 젖을 먹이는 수유 시간까지 단체협약으로 보장했다. 원풍의 기억은 지금도 삶의 열정을 샘솟게 한다.” 현재 병원 요양사로 일하는 김두숙씨는 매일 8시간 일하며 154만원을 받는단다. “37년이 지났지만 원풍의 근로조건보다 더 좋은 곳은 별로 없다.”

1970년대 어용이 아닌 민주노조는 10개 정도에 그쳤다. 원풍 조합원들은 노동자 편인 노조의 협상력을 앞세워 국내 최고 수준의 복지를 누렸다. 기숙사 목욕탕에는 늘 따듯한 물이 나왔다. 집에선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목돈이 급한 조합원들은 신용대출도 받았다. 기숙사 공부방에서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책도 읽고 일기도 썼다.

70년대 ‘민주노조의 전설’ 원풍모방

82년 ‘5공 노조파괴’ 560명 강제해고

37년째 해마다 9월27일 전후 모임


126명 구술 인터뷰 모아 집단자서전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출간

“인간으로 존중받은 인생 최고의 순간”


원풍 해고자들은 현재 대략 60살 안팎이다. 상당수가 지금도 현장 노동자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원풍 노조에서 세상을 배웠다”고 했다. “그때 노조에서 깨달았죠. 노동자라서 혹은 못 배워 창피한 게 아니라 사회가 노동자를 업신여길 뿐이라고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말도 할 수 있게 됐고 자기계발도 했죠. 다른 공장에서는 한 직급 위 상사한테도 하고 싶은 말을 못 했지만 우리는 공장장이 지나가도 먼저 인사를 안 했어요. 같이 했죠. 노조 덕이었요.”(황선금) “원풍 다닐 때 ‘버스안내양’에게 나는 노동자이니 버스 요금을 깎아달라고 당당히 요구했어요. 노동자라는 자부심이 있었죠. 당시 대학생은 회수권으로 할인 혜택을 받고 있었어요. (원풍 해고 뒤 들어간) 다른 공장에선 천대와 멸시를 받았어요.” 공동 집필자 장남수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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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명의 증언은 5공화국 정권이 벌인 노조파괴 공작과 블랙리스트 피해 실상도 낱낱이 보여준다. 아내와 함께 해고를 당한 이영섭씨는 자신이 각서를 쓰지 않아 민간회사에 다니던 형까지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형과 수십 년 불화를 겪었단다.

2001년 이후 원풍 노동자 157명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20여명은 국가 탄압에 대한 피해 의식 때문에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어요. 원풍 해고자라는 게 알려지면 혹시 자식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죠.”(황선금)

국가배상을 받기 위한 소송도 9년 전 시작해 현재 135명이 배상 확정판결을 받았단다. 동지회는 곧 유튜브채널도 만들어 원풍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세상에 널리 알릴 생각이다. 정기총회에 나오는 조합원 2세도 20명 정도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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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 노동자들을 이렇게 오래도록 모이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신뢰감이죠. 10년의 원풍노조 활동으로 생긴 두터운 믿음이 일관성 있게 유지됐어요. 원풍노조 시절은 행복하고 자유로웠어요. 인간답게 살았던 공간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죠. 그때 단체협약으로 사내 복지를 다 쟁취했어요. 단결된 힘으로요. 자부심이 있어요.”(황선금) “여고 시절 친구들이 오래 간다고 하잖아요. 원풍에서 일했을 때가 딱 그 나이였어요. 그리운 청춘으로 남은 시기이죠.”(장남수)

‘노조 하면 나라 망한다’는 인식은 여전히 한국 사회 한켠에 강고히 자리하고 있다. “그때 우리는 실제 빨갱이나 불순분자 취급을 받았어요. 지금 노동운동가에 대한 ‘종북 매도’와는 다른 차원이었죠. 그 시절엔 노동자 수도 적었고 노동자를 대변하는 곳도 없었어요. 지금은 민노총도 있고 힘도 있어요.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른데 지금도 노조를 매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한심해요. 분단된 나라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황선금)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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