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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화려한 동남아 명소 페낭의 `가려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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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세계여행 마니아에게 말레이시아 페낭은 이미 다녀왔거나 곧 방문해야 할 지역일 것이다. 영국풍과 중국풍 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골목 골목이 '인생샷(살면서 제일 잘 나온 사진)' 배경이다. 2008년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최근엔 베트남 푸꾸옥, 필리핀 클락과 함께 동남아시아 여행 '신(新)트로이카'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인생에도 굴곡이 있듯이 아름다운 도시에도 슬픔과 고통의 역사가 서려 있다.

'아편과 깡통의 궁전'은 여행자에겐 쉽게 포착되지 않는 페낭의 생채기와 눈물을 비추는 책이다. 1786년 믈라카해협 북단의 페낭에 영국 국기가 게양되며 피식민지로서 페낭의 기록도 시작됐다. 당시 동인도회사를 대신한 프랜시스 라이트는 깃발을 꽂은 뒤 "풀루 피낭이라는 섬을 차지해 '프린스 오브 웨일즈섬'으로 명명한다"고 선언했다. 그곳이 말레이시아 술탄국 커다의 영지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새로운 지역이 눈에 띄면 수탈하기 급급했던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페낭에 군침을 흘린 건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돈이 열리는 나무' 아편팜, '백색 골드러시'를 일으킨 주석, '근대 산업의 근육' 고무까지 풍부했던 페낭은 동남아의 가나안 그 자체였다. 특히 주석은 중국 남부의 가난한 농민을 불러들이며 '페낭 자본의 시대'를 끌어냈다. 당시 식민지배자는 이런 중국인에게 쿨리 또는 새끼돼지라는 모욕적인 명칭을 붙여 노예처럼 부렸다.

하지만 이 지역 역사에 독자가 통쾌해할 만한 지점이 있다면 돼지 소리나 듣던 화교가 어엿한 구성원이 돼서 협상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페라나칸이라고 불렸던 중국계 이민자는 자본과 노동, 아편팜과 비밀결사를 19세기 무렵 장악해 버린다. 유럽 자본이 페낭 화인권 곳곳에 스며든 1880년대 후반에도 유럽 광산업자는 주석 광산만큼은 섣불리 뛰어들지 못했는데, 바로 이 4대 요소를 거머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서양 제국주의자는 페낭 토착 권력을 단순히 착취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과 '관계'를 형성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흔히 생각하듯 동남아 중국 이주민 권력이 매판권력의 하수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닌 셈이다.

아편팜 주도권을 둘러싼 비밀결사들 간 혈전, 매음굴이었던 '여인관'의 참상, 중국인 하녀 무이차이들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처럼 엮인다. 미술사가인 강희정 교수는 페라나칸 미술을 연구하던 도중 본업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한다. 페라나칸의 구체적 삶을 알지 못한 채로는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지 못하겠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6억 인구' 시장이라며 동남아 진출을 꿈꾸면서도 정작 거주민이 어떤 사람들인지엔 큰 관심 없는 우리는 그저 깃발부터 꽂고 봤던 제국주의자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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