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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화)

[이로사의 신콜렉터]획일화된 주거 문화 벗어나 ‘집의 의미’ 곱씹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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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건축탐구 집’ 넷플릭스 ‘도전! 협소주택’

“집이나 건축이 어디까지인가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인식의 문제인데, 사실 그런 식으로 넓게 보면 자동차도 집이죠. 거기서 잔다면.”

지난 15일 방송된 EBS <건축탐구 집>의 ‘집 배달 왔어요! 이동식 주택’ 편에서 건축가 문훈은 말했다. 강원도 주문진 바닷가에 컨테이너 몇 동을 쌓아 근사한 보금자리를 만든 4인 가족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다. 이동식 주택에 관해서는 건축가들 사이에서도 ‘이것이 집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많다고 한다. 집을 지으려면 뼈대를 세우고 마감을 하는 등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컨테이너와 같은 이동식 주택은 ‘건축 과정’이란 게 생략되기 때문이다. ‘주차’할 땅을 마련해 놓고, 집을 주문하면, 완제품이 쿠팡에서 쌀 주문하듯 배달되어 오는 것이다.(실제로 쿠팡에선 다양한 형태의 이동식 주택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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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컨테이너를 이용해 지은 주문진 바닷가의 이동식 주택. EBS <건축탐구 집>은 매회 다양한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넷플릭스 <도전! 협소주택>은 진행자 존과 잭이 전국을 다니며 14평 이하의 이동식 주택을 만들어주는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쇼로 미국에서 불고 있는 ‘협소주택’의 인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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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주택 등 건축과정 생략된 집 보여주며 ‘집이란 무엇인가’ 질문

별도 공간 없는 ‘몰개성’의 아파트 속에서 삶도 수동적이 되는 건 아닌지

내 삶에 맞는 집 상상하고 설계하고 실현하는 ‘선지자’들 보여주며

원하는 ‘다른 집·다른 삶’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응원해


출연자는 “아이를 아이답게 키우고 싶어서” 서울을 떠나는 이사를 결심했다.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컨테이너를 이용해 집을 지었다. 그들은 이제 획일화하고 외부 공간이나 용도별 공간도 따로 없는 몰개성의 아파트가 아니라, 놀이공간, 휴식공간, 사무공간, 수면공간이 적절히 나뉘어있고 시원한 중정이 있는 집에서 새로운 삶을 산다. 집에서 15분만 걸어 나가면 바다가 있고 아이들은 밤낮없이 뛰어논다.

이날 방송은 ‘이동식 주택’이란 집의 한 형태를 소개하면서 건축의 경계 자체를 묻는 동시에, 서울을 떠나 바닷가와 산자락에 각각 자리 잡은 출연자를 통해 주거 문화에 대한 질문을 함께 던진다. 프로그램은 이것이 용기만 있다면 가능한 일상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건축탐구 집>에 소개되는 많은 집들은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전셋값보다 저렴하다.

<건축탐구 집>은 그렇게 매회 다양한 집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출연자들은 나이도 직업도 처한 상황도 각양각색이지만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이미 한 차례 깨달은, 일종의 선지자들처럼 보인다. 알량하게 분주한 삶에 떠밀려 자기 공간에 대한 성찰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도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스스로 가꾸거나 지은 어떤 집들은 정말로 그 집에 사는 사람을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다. 집터를 알아보고, 내 삶에 맞는 집을 상상하고, 공간을 쪼개어 설계하고, 마침내 그것을 실현하고, 그 집을 고치고 가꾸며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지형적인 단점을 극복하고 5평 땅에 좁고 긴 자신들만의 집을 지어올린 시즌2 1회 출연자는 “내가 원하는 삶이 분명해야 만족할 집이 지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이고 어떤 집을 짓고 싶은지 생각해봤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은 걸까. 도시민들의 궁핍한 주거 공간, 획일화된 아파트 중심의 주거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크게 나의 삶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지금과 같은 집에 살아서 지금과 같은 인간이 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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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컨테이너 하우스는 시원한 중정을 마련해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도록 했다(위 사진). 대출에서 해방돼 자유를 찾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도 대안적 주거형태인 협소주택에 거주하는 이유 중 하나다. EBS·넷플릭스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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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집을 욕망하는가

TV 예능이 집에 대해 이야기해 온 역사는 길다면 길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부터 방송됐던 <일밤-러브 하우스>다. 어려운 형편의 집을 찾아가 집을 전체적으로 고쳐주는 형식이었다. 2015~2016년 즈음 제작된 많은 프로그램은 당시 유행하던 홈DIY 열풍에 발맞춰 실내 ‘인테리어’에 집중했다. <헌집줄게 새집다오>나 <내 방의 품격>은 스튜디오에서 인테리어 배틀을 벌이는 형식이었고, <렛미홈>은 과거 <러브 하우스>쪽에 가까운, 의뢰인의 기존 집을 새롭게 고쳐주는 메이크 오버 쇼였다.

그러나 지금 이 프로그램들은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구해줘 홈즈>와 <건축탐구 집> 정도다. 하나는 의뢰인의 예산과 요구에 맞게 실제 부동산을 찾아주며, 비슷비슷한 아파트가 아니라 국내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주거 형태를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근본적으로 집과 삶에 대해 질문한다. 두 프로그램은 그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획일화된 한국의 주거 문화를 환기하며, 홈DIY나 인테리어 개조를 넘어 본격적으로 ‘다른 집, 다른 삶’을 원하는 대중의 욕구를 반영한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구해줘 홈즈>는 본격 ‘탈서울 조장 방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해줘 홈즈>를 볼 때 매번 가장 크게 드는 감정은 ‘서울 바깥으로 조금만 나가도 집이 이렇게 싸고 좋다니!’ 하는 놀라움이다. 서울로 올수록, 대학가 등 주요 지역으로 올수록 주거 환경은 눈에 띄게 궁핍해진다. 그 차이는 너무 드라마틱해서 분노와 희망을 동시에 자극한다. 예컨대 2억원의 자금으로 서울 청담동에선 반지하 집을 겨우 구하지만, 강원도 양양에선 풍요로운 전원주택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도시 거주민들에겐 ‘보다 인간적인 나만의 주거 환경’에 대한 욕구가 어느 때보다 터질 듯 차올라 있는 듯 보인다. 더 이상 빚을 진 채 똑같은 집합 주택에서, 아이들이 뛰어놀 수도 없이, 무한한 경쟁의 분위기 속에서, 마당도 외부공간도 없는 궁색한 곳에서, 비인간적으로 살 수는 없다는 마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은 자꾸 TV 앞에 앉는다. 일요일 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개그 콘서트>가 아니라 <구해줘 홈즈>를 보며 어디로 이사할까 상상을 거듭하며 잠드는 삶을 산다.

■ 한정된 자원으로

재미있는 것은 집값 상승과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주거 불안 문제와 더불어 대안적 주거에 관한 고민은 세계적으로 비슷한 현상이란 점이다. 넷플릭스 <도전! 협소주택>은 미국에서 불고 있는 ‘협소주택(Tiny House)’ 열풍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프로그램은 진행자 존과 잭이 전국을 다니며 14평 이하의 이동식 주택인 협소주택을 만들어주는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쇼다.(단면적이 작은 단독주택을 뜻하는 한국의 ‘협소주택’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출연자들은 평생 주택담보대출금을 갚으며 살기 싫어서, 갑자기 십여 년간 살던 전셋집이 팔려 쫓겨나서, 자녀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협소주택으로 이사를 준비한다.

프로그램의 재미는 대체로 진행자인 존과 잭이 이 작은 집 안에 출연자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구조를 만들어 넣느라 묘안을 짜내는 데서 온다. 출연자들은 자녀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총 5명이 잠잘 침대를 마련해 달라, 그랜드 피아노를 놓게 해 달라, 턴테이블과 아버지의 유품인 엘피들을 버릴 수 없다… 등 다양한 요구를 해 온다. 이들은 각종 수납공간, 다용도 변신 가구, 가벽과 외부 공간의 활용 등을 통해 좁은 공간에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를 실현해 보인다.

좁은 공간을 기본값으로 살아온 한국 사람으로선 가끔 웃기고 슬픈 순간이 찾아온다. 존은 매회 넓은 집에 살던 출연자들에게 ‘한정된 자원으로 좁은 공간에 익숙해지기’ 연습을 시키는데, 예컨대 물건들을 작은 캐리어 분량으로 최대한 줄이고 게스트룸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보라고 한다든지, 부부가 한 방에서 서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소음을 참는 연습을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들이 연습을 하는 공간이란 것은 서울의 웬만한 원룸보다 넓다. 더구나 한 발짝만 나가면 넓은 외부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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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출에서 해방돼 자유를 찾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사람들, 그런 거주자들의 삶과 추억을 최대한 반영해 작지만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 다양한 거주자들의 사연을 보는 것은 큰 재미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 익숙한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작은 집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는 지극히 실질적인 공간 활용 팁이다.

어느 쪽이든 몰개성의 주거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예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건축탐구 집>에서 말하듯 “떠받들어 살지 않아도 되는 집” “완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집” “맘껏 고칠 수 있는 집”, 무엇보다 ‘일정 크기 이상의’ ‘외부공간이 있는’ 나의 집을 만드는 날까지 TV 앞에서 이사를 상상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이로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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