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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북극의 얼음 뚫고 자라난 ‘자주범의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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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다산기지에서 연구하는 ‘비주류’ 과학자 이유경

여성·엄마·학자로서의 고충과 일상 세밀하게 묘사



한겨레

엄마는 북극 출장 중
이유경 지음/에코리브르·1만5000원

겨울이 되면 끝나지 않는 밤이 계속되는 얼어붙은 땅, 스발바르제도 스피츠베르겐 섬에 다산과학기지가 있다. 이유경 박사는 이 척박하고 황량한 땅을 뚫고 꿋꿋이 싹을 틔우는, 지구에서 가장 씩씩한 식물들을 연구한다.

북극에 사는 3천여 종의 식물 가운데 900여 종은 꽃이 피지 않는 이끼 같은 식물이다. 담자리꽃나무 같은 식물은 빙하기를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드물고 귀하고 장한 존재다. 자신을 거리낌 없이 ‘비주류’라고 말하는 이유경 박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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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과학자로서 나는 비주류였고, 어딘가 얹혀사는 신세였다. 그건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해조류를 선택할 때부터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성으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길일 수도 있다. 과학자 중에서도 여성은 비주류이고, 생물학 안에서도 조류학이나 극지생물학은 비주류이기 때문이다.”

이제 50대에 접어든 여성 극지생물학자는, 지난 20여년 간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해 꿋꿋이 걸으면서 ‘여자도 북극과 남극 연구를 하는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줬다. 과학자가 되려는 여성 청소년들은 물론, 평범하지 않은 길을 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드물고 귀한 존재가 됐다.

<엄마는 북극 출장 중>은 그가 과학자이자 여성이자 엄마로 살아오며 겪은 일들을 진솔하게 엮은 자전적 에세이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 ‘과학자 되기’는 중학교 과학반 활동을 하면서 과학의 세계에 처음 눈 뜬 소녀가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과학자로 성장하는 과정을 들려준다. 저자와 해조류의 운명적인 만남은 서울대학교 식물학과 2학년 때 떠난 채집여행에서 이루어졌다. 바위에 몸을 붙이고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서로 몸을 잇댄 채 버티면서도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하고 포자를 퍼뜨려 번식하는 해조류의 끈질긴 생명력에 매혹당했다. 채집해서 표본을 만드는 것으로는 부족해 홍조류를 애지중지 키웠고, 그때 만난 비단잘록이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2부 ‘과학하기’는 다양한 연구주제로 70여 편의 논문을 쓰면서 부대끼고 고민한 이야기다. 홍조류에서 시작된 저자의 관심사는 외래 유전자가 특정 식물에 들어가서 발현되는 ‘형질전환’, 유전자 정보와 게놈 프로젝트, 해양미생물이 만드는 바이오 필름, 미생물과 박테리아 등으로 경계 없이 뻗어 나갔다. 요즘 그의 호기심은 ‘우주에도 생물이 있을까’ 하는 것인데,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은퇴하기 전에 화성의 토양과 암석이 지구에 오면 샘플을 분석해보리라’ 마음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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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여자로서 엄마로서’의 첫 문단은 “계획에도 없던 임신을 했다. 젠장!”으로 시작된다. “과학자가 되려는 여성들은 대학 입학 때부터 사회의 저항을 받는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여자가 무슨 그런 학과를 가니?”, “석사만 마치고 결혼할 거면 시작도 하지 마라”, “공부하다 아이라도 낳으면 박사 마무리 못 한다” 등등. 남성 연구자들은 결코 들을 일 없는 말들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다가, 천신만고 끝에 “남자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뛰어난 연구실적을 내도 결국은 남자를 뽑는” 것이 현실이었다. 극지에서 보트를 타고 이동할 때 입는 구명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꼭 맞게 감싸줘야 생존용 수트로서 제 기능을 하는데, 죄다 남성용이어서 여성 연구자들은 몇 해 동안이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보트를 타야 했다.

4부는 북극 다산과학기지에서 연구하고 생활하는 이야기다. 눈처럼 새하얀 북극여우와 유유자적 풀을 뜯는 순록이 아름다운 그곳은, 지금 지구상 어떤 곳보다 온난화의 징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사라져 가는 툰드라 식물을 어떻게 하면 지켜낼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식물도감을 만들어 기록하고 알리는 일을 계속해왔다. 식물도감에 실린 108종의 식물 가운데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빙하가 사라진 황량한 땅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는 개척자 식물”인 ‘자주범의귀’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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