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지음/창비(2019)
최진영 소설가의 새 작품 <이제야 언니에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낭독회 자리에 참석했다가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아 며칠째 곱씹는 중이다.
소설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인 ‘이제야’라는 여성인물이 사건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들려주는데, 이처럼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전했을 경우 독자가 쉽게 짐작할 법한 ‘극악한 현실의 고통’만이 이 소설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니다. 피해자를 향해 도리어 폭격과도 같은 시선을 가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폭력적인 말들을 상대하면서 저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제야’의 힘이 제야에게 주어진 상황의 바깥을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나왔던 독자의 질문도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만약 ‘이제야’라는 인물의 곁에 제야를 소중히 여기는 몇몇의 인물들이 없었다면, 그런 관계 없이 고립되어 있었다면 제야는 지금 소설에서 보여주는 방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겠느냐고. 만약 제야가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면 어떤 결론이 만들어졌겠느냐고. 소설가는 질문을 던진 독자에게 만약 그랬다면 어떤 결론으로 향할 것 같은지 다시 물었고 독자는 현실의 제야들이 고립감을 느낄 때 그럴 가능성이 크듯, 제야의 삶 역시도 왠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것 같다고 진솔하게 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소설가는 곧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만약 제야 곁에 제야와 함께하는 관계가 없었을지라도 제야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제야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을 때 현실의 제야들도 자신을 믿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오늘 ‘시동걸기’는 시 대신에, <이제야 언니에게>라는 소설에 실린 ‘작가의 말’을 함께 읽고자 한다.
“누군가 내게 상처 입힌 일에도 내 잘못부터 찾으려고 했다. 내 잘못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타인의 잘못을 실수라고 이해했다. 나만 잘하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어른스럽다’라는 말을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고 자랐다. 책임을 묻거나 외면하거나 눙치려는 어른이 아니라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어른이 한명이라도 나타나길 바랐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저런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내 잘못을 먼저 찾는다. 이제는 정말 그래야만 하는 어른이니까. 익숙한 감정 속에서 울다가 지치고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그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도 있다.// 나는 이런 어른이 되었다고 제야에게 말했다./ 나도 애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계속 말을 걸었다.”(최진영, ‘작가의 말’ 부분, <이제야 언니에게>)
나는 어떤 어른이 되었나. 혹은 어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지금 이곳의 다음으로 갈 수 있는 힘이 너 자신에게 있음을 믿는다고, 나도 그럴 것이라는 말을 전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비로소’라는 의미를 가진 부사이기도 한 ‘이제야’라는, 시간을 믿는 이의 힘이 담긴 이름을 다시 보면서 이 글을 미리 나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은 사람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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