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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15)‘생활고·여성’ 굴레 짊어진 자신과의 싸움…결과는 사후에 ‘퓰리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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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

경향신문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실비아 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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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무서운 건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심한 중년으로 스러져가고 있다는 느낌. 글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꿈속에서 얼어붙어버리고, 거절이라는 환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말도 안돼.”

1940년, 실비아 플라스는 아버지를 잃었다. 열다섯 살에 폴란드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아버지는 땅벌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보스턴대학교 생물학 교수였다. 하지만 당뇨병을 이기지는 못했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자녀들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어머니는 인색했다. 아끼고 또 아꼈다. 똑같은 낡은 코트만 닳도록 입으셨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꼭 맞는 새 교복과 구두를 사주셨다. 피아노 레슨, 비올라 레슨, 프렌치 혼 레슨도 시켰다.” 보람이 있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공부를 잘했다. 어머니의 마음도 깊이 헤아릴 줄 알았다. “성심을 다해, 그 불행했던 심장을 다 바쳐 어머니는 그 순진한 아이들에게 자신이 한 번도 알지 못했던 기쁨의 세계를 가져다주려 애쓰셨다.” 나무랄 데 없는 딸이었다.

1950년 장학생으로 스미스칼리지에 진학한 실비아 플라스는 문학에 심취했고, 1953년에는 ‘마드모아젤’의 편집기자로 활동했다. 1955년 최우등생으로 대학을 졸업한 실비아 플라스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로 향했다. 설레는 날들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1956년 2월, 케임브리지에서 새로 창간한 문예비평지 ‘세인트 보톨프 리뷰’ 출간 기념파티에서 영문학과 고고인류학을 전공한 시인 지망생 테드 휴스를 만났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테드 휴스는 실비아 플라스의 “귀걸이와 헤어밴드를 낚아”챘다. 실비아 플라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테드 휴스의 뺨을 물어뜯었다.” 심상치 않은 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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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왼쪽)와 그의 남편 테드 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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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만난 테드 휴스와 결혼

남편 먼저 작가로 성공에 경쟁심

좋은 시들 찾아 읽으며 야망 키워

여성 시인 리치 만나 ‘라이벌’ 의식


봄 방학을 마치고 실비아 플라스는 테드 휴스와 다시 만났고, 두 사람은 1956년 6월에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후, 실비아 플라스는 집필에 매진했다. 그러나 행운은 테드 휴스를 먼저 선택했다. 1957년 1월 테드 휴스의 <빗속의 매>가 출간되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둘은 미국으로 향한다.

1957년 9월, 실비아 플라스는 모교인 스미스대학교로 돌아와 영문학을 가르쳤다. 강의 이외의 업무들이 괴로웠다. 글을 쓰기도 쉽지 않았다. 악몽에 시달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날이 많았다. 실비아 플라스는 초조했다. 테드 휴스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경쟁심은 더욱 커졌다. 1958년 3월에 실비아 플라스는 자신감을 회복한다. “글을 쓰고 또 쓰고, 지난 8일 동안 나는 시를 여덟 편이나 썼다. 긴 시들, 서정시들, 그리고 천둥처럼 노호하는 시들.”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스는 서로의 작품을 비평했다. 두 사람은 미래를 낙관했다. “내가 쓴 시들이 나를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테드 역시 대영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될 테니까)으로 만들어줄 만큼 훌륭하다고 믿는다.”

실비아 플라스는 경쟁자들을 언제나 의식했다. 좋은 시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누구를 경쟁자로 생각할 수 있을까?” 사포,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크리스티나 로제티, 에이미 로웰, 에밀리 디킨슨,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이디스 시트웰, 메리앤 무어, 필리스 맥긴리 등이 실비아 플라스의 경쟁자들이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가장 가까운 라이벌”은 에이드리언 세실 리치였다. 테드 휴스가 초대받은 하버드대학 낭독회에서 실비아 플라스는 에이드리언 세실 리치를 직접 만난다. “정직하고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심지어 완고하기까지.” 에이드리언 세실 리치는 실비아 플라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시인’이 되겠다는 야망이 한층 커졌다. ‘라이벌’과 명승부를 펼치고 싶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신작 시로 승자가 되고 싶었고, 작품에 더욱 몰입했다. 결과도 좋았다. 1958년 여름,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뉴요커에 실렸다. 대단히 기뻤다. 문제는 ‘여성 시인’이 여성으로서의 굴레를 짊어지는 순간부터 발생했다.

실비아 플라스는 12월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런던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1960년 3월 테드 휴스는 두 번째 시집 <풍요제>를 출간했다. 단숨에 엘리엇, 오든, 스펜더, 루이스 맥니스 등과 같은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실비아 플라스도 1960년 10월에 첫 시집 <거대한 청동상>을 출간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62년에 둘째가 태어났다. 실비아 플라스는 임신과 출산, 양육의 과정을 반복하며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읽고, 쓰고, 일하는” 삶에서 점차 이탈하고 있었다. “분노에 목구멍이 메고, 온몸에 독소가 퍼져 나간다”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대신했다.

임신·출산·양육 등 도맡아 고통

생계 고민하면서도 악착같이 집필

‘버림받고 목숨 끊은 여자’가 아닌

멋진 승부 펼친 작가로 기억 원해


부부의 갈등은 나날이 증폭되었다. 한두 가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테드와 싸움을 한다. 두 번이나 혹독하게 싸웠다. 진짜 이유는, 우리 둘 다 돈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테드 휴스의 외도 사실까지 밝혀지자 실비아 플라스는 별거를 통보한다. 그로부터 4개월 뒤 1963년 2월11일, 31세의 ‘여성 시인’은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은 채 생을 마감했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남편이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실비아 플라스가 우울증에 빠졌고, 결국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살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았다. 테드 휴스에게는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실비아 플라스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정녕 실연 때문이었을까? 수긍할 수 없다. 먼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실비아 플라스가 남긴 시와 소설 그리고 일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결혼 후부터 줄곧 생활고에 시달렸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두려움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결코 글을 써서 먹고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직업이 그것인데도. 에너지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고 글쓰는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돈을 벌려면 뭘 해야 할까?” 무엇보다 실비아 플라스는 ‘돈’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 즉 “최악의 상황은, 이 모든 상황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글을 쓰지 않고 사는 삶”이라고 결론 내렸다.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며, “글을 써서 먹고살지는” 못할 것 같다고 판단한 실비아 플라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글쓰기가 나의 건강이다”라는 고백은 사실이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1962년 10월 테드 휴스와 결별하는 와중에도 실비아 플라스는 시를 썼다. “저는 제 생애 최고의 시들을 쓰고 있어요.” 하지만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실비아 플라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테드 휴스 역시 실비아 플라스는 글쓰기를 신봉한 ‘광신도’였다고 토로했다. “얘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작가의 신. 그 신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꿈속에서도 외치지.” “글을 써라!” 실비아 플라스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면, 지금까지 쓴 글들을 세상에 남기고 먼저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여자가 아니라 삶의 전부를 글쓰기에 걸었던 ‘여성 시인’이었다. “이 세상과 인간에게, 또 세상과 인간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을 개선하고, 다시 배우고 다시 사랑하는 일”을 포기한 채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실비아 플라스에게 글쓰기는 “종교적인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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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이 출간되었고, 1982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사후에 출간된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인은 실비아 플라스가 유일하다. 실비아 플라스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시인의 생명은 짧지 않았다. 글쓰기라는 단 하나의 믿음을 실천했던 실비아 플라스는 자신이 비련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글을 쓸 수 없는 최악의 상황과 타협하지 않았을 뿐이다. 실비아 플라스는 멋진 승부를 펼쳤다.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에게 정직했다. 글쓰는 여자는 자기 자신과 싸운다.

■ 필자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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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장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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