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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기자24시] 페터 한트케의 노벨상 수상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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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학부 시절이었다. 연극 '관객모독' 객석 맨 앞줄에 앉았다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예술은 대개 상황을 설정한 뒤 상황을 응시하는 독자에게 상황 속에서의 선택이나 사유를 추궁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설정된 상황 그 자체'의 무의미와 허위성을 고발하고 있었다. 1966년작 희곡 '관객모독' 번역서 초판본을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뻤다.

한트케는 추종자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예술을 재정의하는 그의 통찰은 깊고 넓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페터 한트케가 호명됐을 때 '탈 만한 사람이 탔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서유럽은 한림원 선택을 맹비난했고 12월 10일 시상식까지 상황은 시계제로다. 예술가의 정치적 소신과 과오, 작품의 우수성을 별개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한트케 논쟁'의 핵심이다.

코소보 사태에서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두둔한 한트케의 처신은 코소보의 분리주의를 이기심으로 보고 민족주의에 방점을 찍은 위험한 행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트케가 '발칸의 화약고'인 코소보의 참상을 외면해 분노를 샀듯이 한림원은 유럽의 화약고에 불을 붙여 공멸을 선택했다. 아무리 생산적으로 보려다가도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고립주의가 횡행해 공동체와 주체성을 고민하는 2019년에 한림원이 한트케에게 노벨상을 주며 인류가 바라봐야 할 정확한 역사의 정면(正面)을 '반어적으로' 꼬집은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위대한 시성과 친일은 구분해야 하는지, 시대와 불화한 작가의 책은 화형에 처해져야 하는지, 미투 가해자의 작품은 거부당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우리는 배웠다. 통합과 분리, 이념과 희생, 부정과 이상…. 선택은 개인 판단이지만 교훈은 명확하다. 삶과 글이 다를 수 없다. 하인리히 하이네상 후보자로 지명된 후 정치적 논쟁이 불거지자 한트케는 "내 작품을 모독하지 말라"며 수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2006년 일이다. "비극과 소극(笑劇)으로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썼던 마르크스는 옳았다. 한트케를 '사랑했던' 독자로서 고개를 돌리려다가도 무력 통합을 지지한 작가에의 비판은 의무라고 믿어본다.

[문화부 = 김유태 기자 ink@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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