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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기고]부마민주항쟁, 두려움에 맞선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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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을 광화문광장에 촛불이 켜졌다. 그 촛불은 점점 커져 청와대 내실의 깊은 곳에서 홀로 지내던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파면시켰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들이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광장의 시위는 횟수를 더해가면서 불어났고, ‘역전의 용사’들이 시위 군중 속에 합류했다. 2016년 2회 촛불에서 광장에 선 나는 어떤 익숙한 감정이 밀려와 몸을 떨었다. 두려움이었다.

경향신문

1980년대 내내 언제나 가까이 있던 두려움. 시위의 현장에서도, 독서토론을 하는 장소에서도, 단순히 선배를 만나는 찻집에서도 따라붙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달라져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에서 대통령의 하야나 탄핵을 외치는데 곤봉이나 최루탄, 소방물줄기, 체포와 구타를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은 폭력과 함께 광장 뒤 깊은 골목길로 물러났다.

2019년 가을, 주말이나 휴일이면 광장에서 국민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리가 갈라져 있으나, 어느 쪽이든 시민들은 두려움 때문에 광장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할 말을 못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40년 전인 1979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공화국이 아니었고, 국가의 폭력은 학교와 거리,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유신헌법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친위세력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접 선출되었고, 대통령과 함께 대의기구를 구성하는 국회의원의 3분의 1 역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접 선출되었다. 국민의 대의기관 직접 선출권을 박탈해버린 유신헌법에 대한 개정 논의조차 긴급조치 1호를 통해 금지했다.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국민의 자유는 억압되었고, 노동자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야당은 들러리 역할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1979년 8월11일 YH 여공 김경숙은 신민당사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고, 10월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당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16일부터 20일 사이에 부산과 마산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 시위를 가리킨다. 부마민주항쟁은 마치 잠들어 있던 용암이 분출하듯 대학생 시위에서 출발하여 일반시민들에게로 순식간에 확산되어 박정희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을 계기로 유신권력 내부의 갈등이 폭발하였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 살해하였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군부정권을 계승하였으나,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을 겪은 대한민국 국민은 전과 같지 않았고 결국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공화국 헌법을 되찾았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부산지역 연행자는 군사재판 43명, 민간재판 18명, 즉결심판 526명, 훈방 471명 등 1058명이다. 마산지역은 군사재판 46명, 민간재판 13명, 즉결심판 125명, 훈방 321명 등 총 505명이다. 부마민주항쟁 당시 연행자들은, 훈방된 사람들을 포함해 하나같이 경찰과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증언한다. 한마디로 “죽도록 맞았다”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항쟁’에 나설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어떤 강한 분노, 어떤 강한 정의감이 아니면 두려움을 뚫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딛고 오늘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서 있다. 무지막지한 폭력에 맞선 그분들의 용기에 대한민국 부마민주항쟁위원회가 조금이라도 보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건섭 |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위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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