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변화는 근무가 매우 효율화되었다는 점이다. 과거엔 매일 8시간을 반드시 일해야 했다. 그런데 업무량의 기복이 큰 만큼 하루에 2시간 정도 일하면 나머지는 할 일이 없을 때도 생긴다. 그러면 전후로 이러저런 일들을 만들었다. 동료와 긴 티타임을 갖기도 하고 ‘미드’를 몰아보기도 한다. 업무 협의, 콘텐츠 동향 연구라는 이름이 붙으면 일 같기도 하고 그냥 잡담, 취미라는 이름이 붙으면 일이 아닌 것도 같다. 지금은 시간에 맞춰 출근하고 일이 끝나면 퇴근한다. 스스로 휴게 시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엄격해졌다. 일정을 띄엄띄엄 짜서 휴게 시간이 느는 것보다는 일을 몰아놓는 게 마음 편하다.
한편 어디에 있었건 일했으면 근로로 인정받는 것도 좋은 변화다. 집에서 잔뜩 일한 게 노동으로 인정 못 받아 억울한 일도 사라졌다. 통화내역, 문자 연락 등 근거가 명확하면 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회사 그리고 제자리에 있어야 일’이라는 통념에는 관리의 용이성이라는 명분 아래 불합리성이 숨겨져 있었다. 눈치 보지 않고 진짜 일에만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다. 나아가 회사는 아침에 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곳이라는 생각도 점점 줄어들 거다. 지금의 싸움은 비효율을 감수하면서 ‘어때야 한다’는 것에 맞춰 살던 틀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과정이다.
일이 몰리면 정신없이 지낸다. 한편으로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의 근로 환경도 챙길 의무가 있다. 확실히 젊은 친구들일수록 워라밸을 중시하는 것 같다. 그들과 좋은 팀워크를 이루기 위해 중요한 조건은 술도 밥도 어설픈 멘토링도 아닌 빠른 퇴근과 적절한 휴식이다. 아무 생각 없이 회의에 들어와 함께 고민하자고 하면 민망해진다. 충분히 생각해서 회의 안건을 미리 정하고 결정은 신속해야 한다.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는데 이제는 장고 자체가 악수가 되어버렸다. 노동 투입량이 많은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하는 동료들은 시간 관리 자체가 큰 미션이다. 너무 긴 시간을 일해야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은 돈이 많이 드는 프로그램처럼 경쟁력을 잃어갈 거다.
회사 입장에서도 직원들이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좋은 일이다. 불필요한 수당 지출을 줄일 수 있고 각종 경비도 아낄 수 있다. 물론 필요한 인력을 더 뽑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 거다. 시간과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로망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젊은 구직자들에게도 악명 높은 방송사의 근무 환경 개선은 매력으로 다가올 거다.
사생활 측면에서 보면 전에는 나인 투 식스가 움직일 수 없는 거대한 박스 존이었다. 개인적인 일과와 근무 시간을 적절하게 조절해서 새로운 시간을 확보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PD들은 출퇴근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지만 8시간을 매일 채워야 했기 때문에 조정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 더 대담하고 획기적인 계획이 가능해졌다. 항상 고갈돼서 뭔가 채우고 싶은 절박함이 있는데 굳이 휴직을 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재충전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다. 그건 회사 일에도 도움이 되는 선순환이다.
PD는 일의 성격상 직장인과 개인사업자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제는 개인사업자에 조금 더 방점이 찍히는 것 같다. 노동의 종말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 불안한 시대를 조금 빨리 경험하고 적응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회사들이 이 국면을 통해 더 건강해지리라 기대한다. 노동자를 쥐어짜는 곳은 도태되고 좋은 환경을 만드는 회사는 늘어날 거다. 다양한 직업 중 하나를 겪은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지금의 변화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에 확실히 섰다.
김신완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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