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0 (목)

[유민호의 도보여행자(Wayfarer)] [1] '유대인 꼰대'의 성지순례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대략 10여년 전부터 1년 중 6개월 이상 여행한다. 주로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이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평생의 대부분을 월세·전세로 버텨왔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 여행이 가능하다. 무거우면 날 수 없다.

필자와 비슷한 나이의 유대인 꼰대를 만난 것은 스페인 마드리드 호스텔에서다. 키부츠에서 태어난 공군 정보장교 출신으로 텔아비브에서 화학 교사로 일하고 있다. 산티아고 성지순례를 마치고 마드리드에 왔다고 했다. 가족 행방을 묻자 아직 순례 중이란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순례 종착지 80㎞ 전쯤 헤어졌다. 난 버스를 타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들른 뒤 곧바로 마드리드로 왔다. 처와 두 아들은 마지막까지 강행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정도에서 끝내는 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SNS로 수시로 연락한다고 하지만, '성지순례 중 처자식을 팽개친 남편'이란 비난이 붙을 법하다. 이 꼰대 유대인의 성지순례 완성은 네 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이뤄진 결과다. 순례길 800㎞ 중 직접 체험한 거리는 200㎞라고 한다. 10년 전 40㎞, 8년 전 60㎞, 4년 전 30㎞, 올해 70㎞다. 중간에 전기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기도 했다고 한다. 순례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도보'로만, '단 한 번'에 완성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필자가 아직 '감히' 산티아고 순례에 나서지 못한 이유다.

이런 생각에 꼰대 유대인의 반응.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이산)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이래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수백 년, 수천 년 기다리며 살아온 민족이 유대인이다. 성지순례도 마찬가지다. 한순간에 끝낼 이벤트가 아니다. 10년 만에 완성한 것도 대단하다. 자기 생각과 체력에 맞게 장기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자 생활 철학이다. 지난 10년간 산티아고를 잊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관광여행식 투어(tour)가 아니라 정처 없이 떠도는 저니(journey)로서의 순례이자 인생이다. 혼자 먼저 왔다고 처자식이 나를 비난할지 모른다는 얘기 자체가 이상하다."

[유민호 퍼시픽21 아시아담당디렉터]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