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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매경데스크] 디플레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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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집 근처에 자주 가는 마트가 있다. 종종 들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사는 곳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물건을 살 때 '1+1' '대박 할인' 등의 팻말이 붙었는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이런 팻말이 없으면 빈손으로 온다. 며칠 뒤 다시 마트를 찾으면 여지없이 전에 사려고 했던 물건엔 '할인' 팻말이 붙어 있다. 이제는 물건을 정가에 사면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1+1' '대박 할인' '초특가 세일'은 일상이 됐다. 할인하지 않으면 물건을 사지 않고 할인할 때까지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면 할인 폭이 더 커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다.

물가가 하락하면서 경기침체를 몰고 오는 디플레이션 기대 심리는 가격 할인을 기대하는 소비자 심리와 유사하다. 소비를 미뤄 낮아진 가격에 물건을 사는 습관이 들면 개인은 이익일 수 있지만 경제 전체적으로는 큰 해악을 가져온다. 소비가 줄면 기업들이 만든 물건이 안 팔린다. 기업들은 속속 문을 닫는다. 생산은 위축되고 경제는 쪼그라든다. 결국 경제 내에서 수요 감소, 물가 하락, 경기 침체가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 고리가 형성된다.

물가 하락 기대 심리는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는 지난 9월 전년 같은 기간보다 0.4% 떨어졌다. 평균적으로 1000원짜리 물건이 996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활 속에서 느끼는 기대 심리는 이보다 훨씬 더 크다. 예를 들어 조만간 '1+1' 물건이 나오기를 기다린다면 물가가 50% 하락할 것을 예상하는 것이다. '세일' 때 20~30%씩 값을 깎아줄 것이란 기대는 예사로운 일이다. 일시적 할인은 지표에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할인 빈도가 잦아지면서 물가 하락 심리는 빠르게 확산 중이다.

소비자의 이런 심리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기업도 물건을 팔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은 잇달아 '초특가 세일'을 벌이고 있다. 이들 매장에선 라면 생수 물티슈 등 생필품 가격을 반값으로 낮췄다. 소비자들의 디플레이션 심리를 공략한 영업 전략이다. 소비자 기대보다 더 가격을 많이 내려야 실질적인 할인행사가 될 수 있어 세일 폭은 갈수록 커진다. 지금이야 있는 물건을 팔기 위해 세일을 벌이지만 다음에는 생산량을 줄여 상황 변화에 대처할 가능성이 크다.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시대의 행동 패턴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한국은행 등 정책당국은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등은 최근 "디플레이션 징후로 보기 어렵다"라고 했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품목에서 지속적인 물가 하락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소비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품목은 460여 개다. 이 중 전기료, 사립학교 납입금 등 사실상 가격이 통제되고 있는 품목이 상당수다. 가중치가 높은 전·월세 가격은 투기 심리와 정부 정책에 영향을 받고 휘발유 등은 해외 상황 변화에 민감하다. 당국자들의 말대로 물가지수가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은 수요 위축에 더해 해외 변수 및 정책 방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때 발생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지표상으로 물가의 광범위한 하락을 확인할 때는 디플레이션이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후일 가능성이 크다.

디플레이션을 진단할 때는 지표보다 '기대 심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 시장에서 물가 하락을 기대하고 소비를 줄이는 행태가 얼마나 확산되고 있는지가 디플레이션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다. 경제 현장은 변하는데 책상에서 지표만 확인하는 식의 안일한 태도로는 우리 경제 초유의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선제적 정책을 펼 수 없다.

[노영우 유통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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