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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가난한 진흙 구덩이에 빠져도 꿋꿋하게 피어난 ‘잡초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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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73) 우묵배미의 사랑

감독 장선우(1990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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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옷감들 너머의 미싱이 돌아간다. 주현미의 노래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손을 움직이는 아줌마들 가운데 남녀 한쌍은 마주 놓인 미싱 위에 무언가를 끄적거린다. 남자는 그날 밤 이루어질 밀회 장소를, 여자는 끄덕이며 ○표를 그리는데 서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질 못한다.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은 우묵배미라는 작은 동네의 치마공장에서 만나게 되는 (유부)남, 배일도(박중훈)와 (유부)여, 민공례(최명길)의 ‘처참한’ 로맨스를 다룬 작품이다. 처참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들이 너무나도 불행하고, 빈곤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결혼 생활은 정서적 뇌사 상태에 가까운데다가 여인숙에 갈 돈이 없어 비닐하우스를 전전할 정도로 이들은 가난하다. 그럼에도 외도를 눈치챈 아내의 발길질에 성할 날이 없는 일도도, 남편으로 인해 진흙탕에 머리를 처박힌 공례도, 꾸역꾸역 만남을 이어나간다.

시퍼런 바람이 새는 비닐하우스에도 적응이 되어갈 때쯤 비극이 닥친다. 속옷까지 벗어젖힌 이들을 비닐하우스 주인, 최씨가 잡아낸 것이다. 결국 일도와 공례는 야반도주를 해버리지만 일도의 아내는 그를 추적해 집으로 끌고 들어오고 일도를 한없이 기다리던 공례 역시, 그를 한번 더 만난 뒤 떠난다.

상당 부분이 두 남녀의 밀회와 정사 장면에 할애됨에도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사랑’이 아닌 ‘가난’이다. 공례는 살아생전 호텔에 가본 적이 없어 일도가 데려간 호텔 카펫을 밟기 전에 신발을 벗어든다. 일도는 지인들에게 구걸한 돈으로 공례와 스탠드바에 간다. 가진 것도 없는 이들이 이토록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도 사치’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치이고, 가난의 구덩이에서 가난의 진흙을 뒤집어쓴 채 가난을 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환각제이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 독재정권의 영화 탄압이 완화되고 봇물 터지듯 나왔던 이른바 ‘한국형 리얼리즘’의 작품 중 <우묵배미의 사랑>은 가장 생생히 가난을, 그리고 가난한 사랑을 기록한 영화다.

김효정/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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