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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은 모든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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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광일 위원장 낭독 ‘추석합동위령제 & 애도문화제’ 축문(祝文) 뒤늦게 화제

10월 3일 국민총궐기 날 제2차 한성옥김동진모자애도장을 치르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다 구속된 허광일(65) ‘고(故) 한성옥 모자 사인 규명 및 재발방지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 위원장(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이 뉴스 메이커로 떠오른 가운데 지난 9월 13일 천막 분향소가 설치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추석합동위령제 & 애도문화제’ 때 허 위원장이 낭독한 축문(祝文)이 탈북민 사회에 다시 회자되고 있다.

허 위원장은 당시 장문의 축문을 길게 늘어뜨리며 낭독해 마치 큰 집안의 종친회를 이끄는 제주(祭主)가 수 백 명의 일족 앞에서 축문을 읽는 모습을 연상케 해 유교 풍습에 낯설던 그 자리에 참석한 탈북민의 뇌리에 오래 남았다.

세계일보

9월 13일 추석 때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추석합동위령제 & 애도문화제’에서 허광일 위원장이 축문(祝文)을 낭독하고 있다.


‘이 해의 차례(次例)’라는 의미로 축문 맨 앞에 관용적으로 쓰이는 ‘유세차~’ 때문에 한 때 축문이 ‘유세차’로 이해돼 순서지에 ‘유세차’로 들어가는 해프닝을 겪기도 한 축문은 “단기 4352년 기해년, 서기 2019년 9월 13일, 음력 8월 15일 대보름 한가위 추석날에 천지신명께 삼가 고합니다. 조상이시여, 오늘 우리가 낫고 자란 고향 북녘 땅을 떠나, 자유 대한민국에 자리 잡은 탈북인들이 여기 한자리에 모였습니다”로 시작됐다.

허 위원장은 “북조선을 이탈한 100명 중에 서너 명만 살아서 올 수 있다는 대한민국에서, 그야말로 목숨 걸로 온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멸시, 냉대, 투명인간 취급,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과 상대적 가난이었다”며 “우리는 북조선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정치적 사상적 신앙적 자유를 위해 중국 국경을 넘었고, 중국에서 비인간적 대우와 차별을 피해 다시 동족인 대한민국을 찾아왔는데 탈북민을 돕는 게 김정은 정권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현 정부의 기조와 맞지 않아 탈북민을 탄압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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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중 가장 과일과 오곡이 풍성하다는 민족 대명절 한가위 중추절 추석에 탈북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탈북 과정에, 혹은 탈북 이후 억울하게 죽은 모든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허 위원장은 이어 “2014년 서울 송파 세 모녀 사망 사건 이후 마련했다는 찾아가는 서비스니, 촘촘한 그물망 서비스니 하는 구호는 우리 탈북민에겐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고 폭로하며 “북녘에서, 북녘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탈북 이후 중국에서, 강제 북송 돼 다시 북녘에서, 몽골과 동남아 등 탈북 루트에서, 우리 탈북인들은 수 없는 사선을 넘었고, 실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당신들의 순교 덕분입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위로하고, 애도하고, 추모하는 이유”라고 추도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다음은 허광일 위원장이 낭독한 축문 전문이다.

축문(祝文)

유(維)

세~차(歲次)

단기 4352년 기해년, 서기 2019년 9월 13일, 음력 8월 15일

대보름 한가위 추석날에 천지신명께 삼가 고합니다.

조상이시여, 오늘 우리가 낫고 자란 고향 북녘 땅을 떠나, 자유 대한민국에 자리 잡은 탈북인들이 여기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탈북인은 2만7000명 안팎입니다. 북조선을 떠나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인은 모두 3만3000여 명이나, 이중 10%인 약 3500명이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일본 독일 노르웨이 등 제3국으로 재이주했고, 2500여 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탈북민 사망자 중 15% 이상이 자살입니다. 대한민국 평균 자살률인 5.4%의 3배 수준입니다. 지난 10년간 무연고 상태로 사망한 탈북민도 42명이나 됩니다.

한부모가정 탈북민은 422명으로 탈북 청소년 중 절반 수준이고, 혼자 사는 독거노인 탈북민은 통계조차 없습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간 사람은 2012년 7명, 13년 7명, 14년 3명, 15년 3명, 16년 4명, 지난해 1명 등 모두 25명으로 집계됐습니다.

하늘이시여, 어려움에 처한 탈북인들을 모두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구천을 떠도는 넋을 거두어주시고, 외로움에 떠는 자들은 외롭지 않게 해주시옵고, 홀로 병들고 늙어가는 자들에게는 쾌유와 건강과 장수의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탈북민 정착을 돕기 위해 설립된 남북하나재단 소속 전문상담사는 69명뿐입니다. 3만 명 안팎인 탈북민 숫자를 고려하면 상담사 1명이 440명의 탈북민을 담당하는 셈입니다. 원래 정원이 100명인데 주무부서인 통일부가 신규 채용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탈북민 정착지원 총 예산도 2018년 1126억원에서 올해 1074억원으로 줄었는데, 내년에는 43억원 더 줄어든 1031억입니다. 정착금 지급 예산도 지난해 584억원에서 올해 411억원으로 감소했습니다.

북한인권개선 예산도 올해 8억7000만원에서 내년 3억5000만원으로 대폭 줄어듭니다. 반면, 내년도 남북협력기금은 올해보다 10.3% 늘린 1조2200억원 규모로 편성했습니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탈북민을 돕는 게 김정은 정권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현 정부의 기조와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2014년 서울 송파 세 모녀 사망 사건 이후 마련했다는 찾아가는 서비스니, 촘촘한 그물망 서비스니 하는 구호는 우리 탈북민에겐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한성옥·김동진 모자 아사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사실 채널A가 처음 보도할 때만해도 우리는 아사(餓死)란 말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굶어 죽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매우 귀에 익은 단어입니다. 아니, 너무 몸서리쳐져 일부러 잊었던 단어입니다.

1994년 북조선에선 김일성 사망과 대기근이 겹치면서 일명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5~6년 사이에 무려 30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대량 탈북민이 발생한 것이 그 즈음입니다.

우리는 북조선에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정치적 사상적 신앙적 자유를 위해 중국 국경을 넘었고, 중국에서 비인간적 대우와 차별을 피해 다시 동족인 대한민국을 찾아온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젖과 꿀이 넘치는 나라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나라 중 가장 성공한 국가였습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민주화와 복지가 세계 최고 수준을 지향했습니다.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수십 만 명의 공안들이 감시하는 중국에서 생활하다, 이역만리 동남아 태국과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를 거쳐 대한민국까지 오길 잘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만들어졌다는 인천국제공항을 하늘에서 만났을 때에는 눈시울이 적셔지기까지 했습니다. 길거리마다 거지가 득시글하다고 북조선에서 배었던 남한이, 사실은 지상낙원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한동안 말을 잊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남조선은 우리 탈북민들에겐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국정원의 비인간적인 간첩 여부 조사였습니다.

어렵사리 합동심문 관문을 통과하고 2개월 남짓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면 이북에서 살 때와 별만 다를 게 없는 10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와 6개월도 못 먹고 살, 수백만 원의 정착금이 전부였습니다.

조상이시여, 물설고, 낯설고, 체제 설고, 언어도 설은 이 땅에서 우릴 보고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알아서 직장도 구하고, 알아서 연애도 결혼도 하고, 알아서 먹고 살라는 데, 모든 게 자유라는데, 자유가 낯선 우리에겐 그야말로 맑게 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뭘 알아야 어찌 해보기라도 하지 않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좀 더 잘 먹고 살기 위해,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돕기 위해 먼저 온 탈북인 선배, 하나원 선배를 믿고 초기 정착금을 맡겼다가 홀라당 떼어먹힌 일도, 뭔지도 모른 채 돈을 늘려준다기에 피라미드에 걸려 알거지가 되고 난 뒤에야 자본주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유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란 것도 뒤늦게 아주 쪼금 알게 됐습니다.

북조선을 이탈한 100명 중에 서너 명만 살아서 올 수 있다는 대한민국에서, 그야말로 목숨 걸로 온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멸시, 냉대, 투명인간 취급,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과 상대적 가난이었습니다.

국립과학구사연구원은 이번 한성옥 모자 죽음에 대해 “뚜렷한 질병이나 손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약물이나 독물 역시 검출되지 않았다”며 사인불명이라 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타살 혐의점이나 자살 정황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으나 국과수 부검 결과 직접 사인이 ‘불명’으로 나왔기 때문에 아사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결국 굶어 죽었다는 결론밖에 없는데, 뭐가 무서워서인지 그 말은 못하고 있습니다.

한성옥 모자 아사 사건이 알려진 이틀 후인 8월 16일엔 한국외국어대학교 1학년생인 탈북인 이현철 군이 한강에 몸을 던졌고, 8월 31일엔 경기도 안양의 한 고시원에서 45살 탈북민 남성이 “심적으로 너무 힘들다. 죽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하늘이시여, 이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육신은 비록 이방인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잃어버렸더라도 순결한 영혼만은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여 주시옵소서.

힘들었던 이들의 영혼을 품어 힘들지 않고, 외롭지 않고, 아프지 않은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비극적 죽음은 또 있습니다. 지난 4일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이 수여하는 북한인권특별상을 받은 북한 공민 한원채 씨는 대한민국으로 오기 위해 온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탈출해, 반인륜적인 북한 인권 실상을 폭로한 수기 ‘노예공화국 북조선 탈출’을 집필한 후 체포 돼, 북송 3일 만에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분입니다.

고 한원채 씨는 북송 직전 차녀에게 “저 어둠의 세계, 북조선의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북녘 주민 모두가 자유를 찾고, 노예에서 해방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대한민국에 못 가더라도 이 글만은 반드시 출판되어 북조선 사람들이 김일성 부자의 잔인한 독재체제에서 얼마나 많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고, 신음하며 살고 있으며,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는 사실상 유언이 된 말을 남겼습니다.

이밖에도 북녘에서, 북녘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탈북 이후 중국에서, 강제 북송 돼 다시 북녘에서, 몽골과 동남아 등 탈북 루트에서, 우리 탈북인들은 수 없는 사선을 넘었고, 실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여기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당신들의 순교 덕분입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대신해 죽었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위로하고, 애도하고, 추모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은 1년 중 가장 과일과 오곡이 풍성하다는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 중추절 추석입니다. 모처럼 탈북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탈북 과정에, 혹은 탈북 이후 억울하게 죽은 모든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냅니다.

조상이시여,

북녘에서 굶어 죽은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북녘에서 병들어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북녘에서 얼어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북녘에서 맞아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북녘에서 억울하게 처형당한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북녘 정치범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북녘을 탈출하다 압록강과 두만강에 빠져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북녘을 탈출하다 총에 맞아 죽은 불쌍한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북녘에 잘못 태어나 행복도 자유도 풍요도 사랑도 모른 채 죽어간 모든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중국에서 인신매매 당해 출산하다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중국에서 강제 결혼해 살다 맞아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중국에서 임금도 못 받고 중노동 하다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중국 공안에 잡혀 북조선으로 끌려가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국행을 위해 동남아 밀림에서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국행을 위해 몽골 사막에서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국에서 궂은 일 하다 죽은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국에서 자살한 외롭게 불쌍한 모든 영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국에서 굶어 죽은 한성옥 김동진 모자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한국에서 죽은 외대 학생 이현철 군과 40대 남성을 구원하여 주시옵서서.

하늘이시여,

이 밖에도 우리가 모르는 숱한 이유로 죽은 불쌍하고 외로운 모든 영혼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2019년 추석날 아침

3만 탈북인을 대표하여 삼가 허광일이 천지신명 조상님께 아룁니다.

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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