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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사표 내고 튄다고?" 불벼락 예상했는데… 날 사장님으로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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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저 회사 그만두려고 합니다.'

오늘도 컴퓨터 바탕화면 한쪽 '내 파일' 폴더 속에 숨겨놓은 사직서를 썼다 지웠다 하는 월급쟁이들. 내가 날리는 저 한마디에 충격받을 상사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된 오늘을 넘길 힘을 얻는다. 정상적인 회사라면 "왜 그래 이 과장. 지금 나가면 어쩌려고 그래…" 하며 붙잡는 게 순서다. 윽박지르거나 달래도 안 되면 그냥 보내주는 게 끝이다.

그런데 직원의 퇴사 결정을 응원해주다 못해 '예비 사장님'이라고 부르면서 창업 준비를 잘하라고 사무실을 빌려주는가 하면, 사업 모델까지 쥐여주면서 자립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해주는 '이상한 회사'가 있다. 특이한 일 많이 벌이기로 유명한 현대카드 얘기다.

현대카드의 퇴직 직원 창업 지원 프로그램 'CEO플랜'이 사원 복지 문화를 새로 쓰고 있다. CEO플랜을 통해 지난 5년간 사장님으로 변신한 사람이 총 78명. 이 중 76명(97.8%)은 안정적으로 사업할 뿐 아니라 120명의 신규 고용도 창출했다. 한 해 10만여명이 창업해 5년 생존율이 28.5%에 불과한 우리나라 현실과 크게 다르다. "평생직장은 없다. 모두가 현대카드 사장이 될 수도 없다. 언젠가는 퇴사해야 할 텐데 준비 없이 창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하지 않도록 퇴사 직원들을 도와주는 것도 회사가 할 일"이라는 게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의 생각이다. CEO플랜이 배출한 새내기 사장님들을 만나봤다.

◇퇴사 직원의 '사장님' 변신 돕는 회사

지난 1일 찾아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주택가 한적한 골목에서는 콩 볶는 냄새가 진동했다. 8.2평(27㎡) 작은 가게 입구에는 'CEO플랜 16호점'이라는 팻말도 달렸다. 2년 전까지 현대캐피탈 준법감시팀 차장이었던 황웅상(50)씨가 차린 로스터리 카페 '블랙모티브'다.

조선비즈

현대캐피탈 차장에서 카페 사장님으로 - 20년 다닌 직장에 사표를 던진 황웅상씨는 서울 당산동에 커피콩 볶는 카페를 차렸다. 매장 입지 선정부터 원두 납품 업체 발굴까지, 모두 전(前) 직장인 현대캐피탈에서 도왔다. 황 차장에서 황 대표로 변신한 그가 자신의 ‘블랙모티브’ 매장에서 활짝 웃고 있다. 등 뒤로 원두 볶는 기계가 보인다. /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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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현대캐피탈에서 일했던 황씨는 늘 은퇴 후를 고민해왔다. 어느 날 회사 직원들이 이용하는 사무실 한쪽 커피 기계가 두 눈에 들어왔다. 이 커피콩은 어디서 납품받는 걸까, 내가 콩을 직접 공급하면 어떨까, 커피 수요도 늘어나는데 사줄 곳은 많지 않을까. 회사에 퇴사 계획을 알리자 CEO플랜팀은 먼저 그의 창업 의지부터 집중 점검했다. 가족의 퇴사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입문 과정을 통과한 그에게 '예비 사장님' 명찰을 붙이고 회사는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적당한 원두 수입처를 알아보고 안정적으로 납품할 거래처를 발굴하는 일, 임차료가 비싸지 않으면서 접근성도 괜찮은 콩 볶는 매장 입지를 찾는 일 등을 모두 회사가 도왔다. 황 사장은 "혼자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을 것"이라며 "어떤 콩은 117도에서 13분 만에 기계에서 배출해야 가장 맛있다는 것도 회사와 함께 알아냈다"고 말했다.

당산동 '블랙모티브' 카페는 현대카드가 프랜차이즈 모델로 개발한 1호점이다. 창업 희망자 중 카페를 차리겠다는 사람이 31%로 가장 많다. 하지만 프랜차이즈에 가입하면 로열티와 가맹비 부담에 허덕이다 결국 몇 년 안에 가게를 접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카드는 매장과 집기 등 브랜드 디자인과 메뉴 개발을 직접 해서 퇴사 직원 5명에게 매장을 내줬다. 물론 로열티나 가맹비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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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사원에서 독서실 점주로 - 석 달 전 현대카드를 퇴사한 김선국씨는 현대카드가 직접 개발한 독서실 프랜차이즈의 점주로 변신했다. 서울 상암동에 연 매장에는 손님으로 만석이었다. /김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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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상암동 아파트단지 상가 2층에는 '사장님' 명함을 판 지 이제 막 석 달 된 김선국(34)씨의 독서실이 성업 중이다. 얼마 전까지 현대카드 사기거래관리팀 사원으로 일했던 김씨는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 사업하기로 마음먹고 예비 CEO 과정을 밟았다. "어렵게 들어온 회사지만 직장 생활로는 아이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CEO플랜팀의 도움으로 육아에 많은 시간을 낼 수 있는 무인 관리형 독서실을 창업했다. 그가 차린 '그린스터디' 독서실 역시 현대카드가 만든 프랜차이즈 모델이다. 회사는 매장 디자인과 소품을 제공해주고 인테리어 협력업체도 싼값에 연결해줬다. 김씨는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으로 생활하다 어떤 날은 3만원 벌고 어떤 날은 150만원 버는 생활이 아직은 낯설고 불안하다"면서도 "하지만 나만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독서실·카페 모델 개발해 무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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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현대카드서 퇴사 후 창업한 사람들은 초기 투자금으로 평균 9000만원을 썼는데, 독자 프랜차이즈 모델로 창업한 이들은 이보다 30% 적은 6000만원이면 족했다.

블랙모티브 황 대표와 그린스터디 김 대표는 월 매출 1300만~1500만원에 40~60%대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창업 2년 안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걸로 기대하고 있다. 현대카드 창업지원팀 임원 부장은 "많은 창업자가 안전한 길을 찾겠다고 프랜차이즈에 가입하지만 로열티와 가맹비 부담에 허덕이는 게 현실"이라면서 "그간 쌓인 창업 지원 노하우로 독자 브랜드를 만들어서 창업 경쟁력을 높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CEO플랜팀은 창업 후 매출 그래프를 분석해 매출이 왜 떨어졌는지 분석하고 신상품 개발도 지원해준다.

창업 지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업종은 카페(31%)다. 요즘은 독서실·스터디카페(17%)가 음식점(17%)만큼 인기가 좋다. 고객을 직접 응대하지 않고 무인으로 돌아가는 방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영관 창업지원팀 차장은 "창업 지원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다름 아닌 인사하기"라고 했다. 허리 굽혀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법을 배우는 데만 몇 주가 걸린다. 이른바 '회사원 물빼기' 작업이다.

현대카드는 한강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여의도 전경련 42층에 'CEO 라운지'도 차렸다. 성공한 사장님들을 여기 초청해 예비 CEO들에게 성공담과 실패담을 직접 듣게 한다. 또 빈 사무실 공간도 최장 6개월까지 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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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준비하세요” 퇴사자 위한 라운지까지 마련 - 현대카드가 여의도 전경련회관 42층에 마련한 ‘CEO라운지’. 사표를 내고 창업을 준비하는 퇴사자들에게 무료로 사무 공간을 빌려주고, 성공한 사업가들을 모셔 강연도 연다. /현대카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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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부장은 "현대카드가 또 무슨 쓸데없는 데 돈을 쓰나 하는 반응, 굳이 나간다는 사람에게 잘해줄 필요가 뭐 있느냐는 회의적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복지제도 덕분에 직원들은 회사를 더 든든하게 생각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안정적인 고용도 창출하는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기자(ej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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