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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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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을 따뜻하게 데운 소설가 한강 "광주, 세월호 참사에 대해 진정한 애도를 해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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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소설가 한강이 28일(현지시간) 스웨덴 예테보리국제도서전에서 열린 세미나 후 독자에게 최근 스웨덴어로 발간된 <흰>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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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은 스웨덴 2019 예테보리국제도서전의 ‘빅 스타’였다. ‘주빈국 한국의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 현재 ‘스웨덴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에 이어 최근 <흰>이 스웨덴어로 번역돼 출간됐고, 도서전 전시장엔 커다란 한강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한강은 지난 27일(현지시간) 진은영 시인과 함께 ‘사회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대담을 진행한 데 이어 <흰> 출간과 관련한 단독 세미나를 28일 진행했다. 27일 진행된 120석 규모 대담엔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십명이 입장하지 못해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28일 375석 규모 대형 강당에서 이뤄진 단독 세미나에도 사람들이 가득찼다. 현지 언론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스웨덴에서 발간 부수가 가장 많은 일간지 다겐스 뉘히테르(Dagens Nyheter) 등의 인터뷰가 쇄도했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한강의 작품은 스웨덴에도 3권이 출간됐다. <채식주의자>는 2만5000부가량 판매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소년이 온다>는 6000부가 판매됐다. 예테보리도서전에선 ‘사회적 상처’와 ‘개인적 상처’를 테마로 <소년이 온다>와 <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애초 우리는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분리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년이 온다>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어 큰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인 책이며, <채식주의자>는 한 여자의 내면을 따라가는 작은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소설도 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에서 참혹히 희생당한 중학생과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강은 2009년 용산참사를 보고 광주를 떠올렸다. 한강은 도서전에 낸 에세이에서 “그것이 나는 광주라고 생각했다. 광주는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함께 하는 모든 시공간의 보편적 이름”이라며 “광주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무엇”이라고 말했다.

한강이 ‘80년 광주’에 대해 쓰면서 ‘사회적 상처’를 다뤘다면, <소년이 온다>를 쓴 후 ‘애도되지 못한 죽음’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개인적 상처를 떠올린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숨진 언니를 생각하며 쓴 <흰>이 그렇게 탄생했다. 한강은 <흰>에 대해 “제가 쓴 책 가운데 가장 자전적인 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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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이 28일 예테보리국제도서전 세미나에서 <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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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흰>에서 화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나치에 의해 사람들이 총살당한 벽 앞에 놓인 초와 꽃을 보며 말한다.

한강은 “20세기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 많은 상처를 남긴 시간이었다. 한국에선 전쟁부터 시작해 80년 광주의 5월이 있었다”며 “우리가 수도 한 복판에서 이런 애도를 해보았나, 그걸 했어야 하는게 아닐까? 2014년 봄에도 비극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애도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의미를 담아서 그 문장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 인간의 폭력에서 시작해 배로 기어서 인간의 밝은 부분에 다다르려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며 “우리 안에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믿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언니에게 ‘흰 것’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단기간에 중요한 작가로 자리잡았다.” 한강의 소설을 스웨덴어로 펴낸 나투르 앤 쿨튀르의 편집자 니나 아이뎀이 말했다. 그는 “한강의 소설은 자기만의 색채를 갖고 있다. 시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했다. <채식주의자>에 대해 “자유, 사회구조, 여성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자기 삶과 신체의 결정권, 삶의 주도권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며 “신작 <흰>에 대한 현지 비평과 언론의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아시아계 독자들은 <채식주의자> 등에 그려진 가부장적 폭력에 깊이 공감했다. 세미나에 참석한 린다 트란은 “조부모가 베트남에서 이주해왔다. 아시아인으로 유사한 문화·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설에 묘사된 폭력에 공감할 수 있었다”며 “한강은 사회적 문제나 고통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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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예테보리도서전에서 소설가 한강과 진은영 시인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다. 예테보리국제도서전 제공


‘사회적 트라우마’에 대해 한강과 함께 대담을 진행한 진은영 시인은 세월호 희생자의 생일 시를 담은 시집 <엄마, 나야>에 참여했다. 진은영은 “문학을 통해 미약하지만 연대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종이공장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기계에 팔이 끌려들어가 목숨을 잃는 끔직한 사고들이 많다. 작가로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하얗고 부드러운 종이 안에도 타인의 고통과 한국노동의 현실이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면서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사물이 정치적·역사적·사회적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2019 예테보리국제도서전은 주빈국 한국과 함께 ‘성평등’ ‘미디어 정보 해독력’을 주제로 열렸다. 소설가 김금희와 김동식 문학평론가는 ‘한국문학의 페미니즘과 그 미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쓴 <흐르는 편지>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소설을 펴낸 소설가 김숨과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경애의 마음> 등을 펴낸 김금희는 ‘젠더와 노동문제’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김금희는 “스웨덴 독자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미투 운동이었다. 스웨덴에서 미투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작년에 성폭력 사건으로 노벨상 수상작에서 문학이 제외됐다. 한국의 미투운동이 변화를 낳았는가란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26~29일 나흘에 걸쳐 열린 도서전엔 2만원에서 44만원에 이르는 입장·세미나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8만여 명이 찾아 성황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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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국제도서전에 걸린 소설가 한강의 대형 포스터. 이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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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도서전에서 한강 세미나를 듣기 위해 도서전 참가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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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테보리|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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